10대들의 시간을 뺏은 ‘수상한 작업실’
10대들의 시간을 뺏은 ‘수상한 작업실’
  • 김혜경 기자
  • 승인 2022.10.21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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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스튜디오를 찾은 청소년들이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사진=도서문화재단 씨앗]

26,329시간. 서울 종로구 동숭동에 위치한 청소년 작업실 공간 스토리스튜디오·스토리라이브러리가 2020년부터 12~19세 청소년들에게서 빼앗은(?) 시간의 양이다. 무릇 청소년기란 시간은 부족하고, 재밌는 건 넘쳐나는 시기가 아니던가. 그런데 아이돌 콘서트도 아닌 ‘작업실’이 그들을 움직이게 했다. 수도권은 물론 전국 각지의 청소년들이 즐겨 찾았고, 부산에서 올라오는 청소년도 있었다고.

두 공간은 내년부터 ‘제3의 시간’이라는 어린이·청소년도서관으로 새로운 공간에서 다시 문을 열기 위해 잠시 운영을 멈춘 상태다. 청소년들에게 ‘스스’와 ‘스라’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큰 사랑을 받아 온 이 수상한 작업실의 비밀이 궁금했다. 지난 19일, 2년 3개월의 지난 운영 기간을 돌아보는 아카이브 전시 ‘타임존(Time zone, 尊)’을 찾았다.이곳에 들어선 모든 청소년은 작업실로 출근한 ‘작가’가 된다. 실제 작성했던 출퇴근 기록부도 남아 있다. 스토리라이브러리 기준, 평균 체류 시간은 2시간 40분. 길게는 10시간 가까이 머문 기록도 있다. 입장을 비롯해 모든 이용은 무료이며, 와서 잠을 자는 것만 아니면 꼭 작품을 제출하지 않아도 자유롭게 둘러보며 머물다 갈 수 있다. 공간의 매니저들은 편집자 역할을 맡아 이들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충분히 탐색할 수 있도록 제안과 격려를 건네고, 원하는 대로 표현할 수 있도록 각종 도움을 주며, 이들의 작업 과정과 작품에 담긴 이야기를 아카이빙한다.

스토리라이브러리에서는 청소년들의 이야기가 책이 된다. [사진=도서문화재단 씨앗]
스토리라이브러리에서는 청소년들의 이야기가 책이 된다. [사진=도서문화재단 씨앗]
자신의 이야기를 책의 형태로 엮어 볼 수 있는 제작 존
자신의 이야기를 책의 형태로 엮어 볼 수 있는 제작 존

작가라는 프레임은 책을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게 한다. ‘스토리라이브러리’는 책을 통해 영감을 얻고,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어 볼 수 있는 공간이다. 책이 중심이 되는 공간이지만 일반적인 도서관처럼 고요하지는 않다. 이용자들은 타자기로 마음에 드는 문장을 필타하며 보다 능동적으로 읽고, 마음에 드는 글과 이미지를 찢어 스크랩북 형태의 책으로 만들기도 한다. 종이 안경을 쓰면 그 안에 적힌 글자가 보이는 ‘안경 책’처럼 독창적인 형태의 수제 책도 있다. 서가에는 서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베스트셀러나 스테디셀러부터 실험적인 독립출판물까지 다양한 책이 구비돼 있지만, 가장 인기 있는 책은 같은 10대 작가가 펜으로 꾹꾹 눌러 쓴 책이라고 한다. 실패작과 미완성 작업물도 인기다. 이들이 ‘독자’보다는 ‘작가’의 눈으로 책을 살펴보기 때문이다. 또래 친구의 표현 방식에서 힌트를 얻어 자신의 창작으로 연결하거나, 같은 주제로 한 페이지씩 글을 덧붙이며 자연스럽게 공동 집필을 하기도 한다.

두께와 사이즈, 재질에 따라 세밀하게 분류된 종이와 색색의 마커펜 등을 취향에 따라 골라 쓸 수 있는 도구 존, 책을 그럴듯하게 가제본해 볼 수 있는 제작 존까지 있어 가벼운 책 한 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묶어 내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조금 더 본격적으로 출판을 해 보고 싶은 이들을 위한 ‘독립출판 워크숍’도 주기적으로 진행된다. 이 워크숍에서 완성된 책들은 인쇄 부수가 많지는 않지만, 독립출판 북페어에서 모두 매진되는 의미 있는 성과도 거뒀다. 스토리라이브러리는 작가들에게 북페어 참가뿐만 아니라 인스타그램 라이브 방송 등을 통해 한 명의 작가로서 독자들과 만나는 ‘작가 토크’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각자의 개성이 묻어나는 스토리스튜디오 작가들의 작업 테이블 [사진=도서문화재단 씨앗]
각자의 개성이 묻어나는 스토리스튜디오 작가들의 작업 테이블 [사진=도서문화재단 씨앗]
톱질을 할 수 있도록 마련된 U자형 나무 테이블에는 영광의 상처가 가득하다.

‘스토리스튜디오’는 책이라는 틀에 갇히지 않고 음악, 영상, 조형 등으로 자유롭게 자신의 이야기를 상상하고 표현할 수 있는 공간이다. 여기서는 조금 더 활달한 에너지와 색채를 만날 수 있다. 어떤 이용자는 “탄광처럼 시끄럽다”고 표현했을 정도다. 톱질을 할 수 있도록 마련된 U자형 나무 테이블에는 상처가 가득하고, 미술 작업에 사용되는 드라이기엔 물감이 덕지덕지 묻어 있다. 사진 존에서는 주로 핸드폰을 사용해 사진을 찍는 청소년들에게 폴라로이드, DSLR, 필름카메라, 캠코더 등 다양한 촬영 장비를 대여해 준다. 인기 게임 ‘마인크래프트’를 즐길 수 있는 게임 존도 있다. 단, 크리에이티브 모드로만 플레이가 가능하다. 이용자들은 가상 세계를 건축할 수 있는 ‘마인크래프트’로 다양한 주제의 숏폼 영상 콘텐츠를 만든다. 음악 존에서는 쉽게 접할 수 없는 LP를 감상해 보거나, 음악 앱 플레이리스트를 서로 공유할 수 있다.

“나에게 스토리스튜디오는?”이라는 질문에 청소년들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놀이공원’, ‘무시받지 않는 곳’, ‘무엇이든 가능한 편안한 아지트’ 등의 답변을 내놨다. [사진=도서문화재단 씨앗]
“나에게 스토리스튜디오는?”이라는 질문에 청소년들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놀이공원’, ‘무시받지 않는 곳’, ‘무엇이든 가능한 편안한 아지트’ 등의 답변을 내놨다. [사진=도서문화재단 씨앗]

한편, 스토리스튜디오·스토리라이브러리를 운영하는 도서문화재단 씨앗은 기존의 공공도서관 내에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공간을 조성하는 ‘space T’, ‘모야’ 사업도 함께 진행하고 있다. ‘스스’와 ‘스라’에서 청소년들을 관찰하고, 이들과 직접 소통하며 쌓은 데이터가 이러한 사업의 밑바탕이 된다. 일종의 실험실인 셈이다. 추후 독립출판 워크숍을 통해 만들어진 10대 작가들의 책도 협력 도서관 서가에 꽂힐 예정이다.

이미 도서관 연계 사업을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는 공간이 직접 도서관으로 거듭나고자 하는 이유는 뭘까. 도서문화재단 씨앗의 김정민 실장에게 도서관이 되면 어떤 점이 달라지느냐고 묻자, “규모도 지금보다 커지고 책에 기반한 실험도 더 활발해지겠지만, 무엇보다 청소년들이 더 안심하고 찾아올 수 있고, 부모님들도 안심하고 보낼 수 있는 공간이 될 것”이라고 답했다. 청소년 작업실이라는 개념이 생소하다 보니 직접 와 보지 않고서는 진가를 깨닫기 어려운데, 도서관이라는 이름으로 안전한 공공 공간이라는 인식을 심어 주고 싶다는 것이다. 또 그는 “좋아하는 것을 탐색해 보고, 자기 생각을 표현해 보는 경험도 부모의 경제력이나 지역 인프라 등에 의해 격차가 생긴다. 도서관은 그런 부분을 해소해 줄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청소년들이 꾸민 ‘스토리스튜디오의 장례식장’

전시 후반부, 청소년들이 꾸민 ‘스토리스튜디오의 장례식장’을 만났다. “그는 좋은 친구이자 우리들의 안식처였습니다. (…)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함께 있어 준 ‘스스’를 떠나보내게 되어 더욱 가슴이 아픕니다.” 엄숙한 추모의 글 밑에는 ‘추모글 낭독-스스 소감 발표-절-끝’이라는 식순이 나와 있고, 제사상에는 직접 만든 치킨, 피자, 초밥 등의 음식 모형이 올라 있었다. 이 작품을 만든 이들은 검은 넥타이까지 만들어 매고 진지하게 장례 의식을 치렀다고 한다. 아무리 새 출발을 준비하고 있다지만, 늘 애정을 갖고 머무르던 공간이 문을 닫는 건 어쩔 수 없이 서운한 일이었을 테다. 놀라운 건 그 속상함을 표출하는 방식이었다. 이 공간을 떠나보내는 마지막 순간마저 자신만의 창의적인 작품으로 표현해 내고 있었다.

이번 전시의 제목인 ‘타임존’은 집이나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과는 다른 ‘제3의 시간’이 흘러가는 공간이라는 의미다. 학생이라는 사회적 역할에서 벗어나,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서 사유하고 표현하는 시간이 얼마나 무궁무진한 가능성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 나누고 싶어 준비한 전시라고 했다. 미래의 도서관에서 그 가능성의 세계를 보았다.

[독서신문 김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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