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미한 삶’ 대신 ‘존엄한 죽음’을 원하는 사람들
‘무의미한 삶’ 대신 ‘존엄한 죽음’을 원하는 사람들
  • 김혜경 기자
  • 승인 2022.09.05 06: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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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마이아는 고통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처절하게 노력했다. 하지만 의미는 없었고, 그저 끝없이, 끝없이 하루가 이어졌다.”

-케이티 엥겔하트, 『죽음의 격』 中

지난 6월, 국내 최초로 말기 환자가 의사의 조력을 받아 스스로 삶을 종결하는 것을 허용하는 일명 ‘조력존엄사법’이 발의됐다. 현행법은 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에 한해 연명치료 중단을 허용하지만, 말기 환자의 의지에 따른 의사 조력자살은 허용하지 않는다.

서울대병원 가정의학과 윤영호 교수팀이 해당 법안과 관련해 국민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실시한 결과, 입법화에 동의한다는 응답이 76.3%로 나타났다. 동의 이유는 ‘남은 삶이 무의미하기 때문’(30.8%), ‘좋은(존엄한) 죽음에 대한 권리’(26.0%), ‘고통의 경감’(20.6%) 등이었다. 고령화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웰다잉’(좋은 죽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가운데 우리 사회가 죽음을 바라보는 인식도 많이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최근 출간된 『죽음의 격』(은행나무)은 존엄사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도 했던 기자 케이티 엥겔하트가 6년 동안의 집요한 취재로 ‘존엄한 죽음’을 둘러싼 이야기들을 추적한 책이다. 저자는 삶이 참을 수 없이 고통스러워 평온한 죽음을 바라는 환자들과 존엄사법 안팎에서 이들을 돕는 의사들의 사례를 중심으로 존엄한 죽음의 조건을 묻는다.

말기 환자에게는 질병의 고통도 문제지만, 가장 큰 문제는 남은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저자가 인터뷰했던 많은 사람은 존엄성을 정확히 ‘괄약근 조절’과 동일시하며 “속옷에 똥을 싸거나 엉덩이를 닦아줄 누군가가 필요하지 않을 때까지만 삶이 존엄할 것”이라고 말했다. 말 그대로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존엄성이란 그 정의가 다소 불확실한 개념이지만, 환자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인간의 존엄성을 구성하는 맥락을 발견할 수 있다. 각기 다른 사연을 지닌 그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가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미국 오리건주 보건당국 자료에 따르면, 존엄사를 요청한 사람들은 생애 말기 찾아올 자율성 상실을 가장 걱정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인간이라면 누구나, 말기 환자이든 아니든 간에 평화로운 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잘 알려졌듯이 스위스에서는 의사가 외국인의 존엄사를 도와도 처벌받지 않는다. 캐나다, 네덜란드, 벨기에의 존엄사법은 죽음이 임박해야 한다는 조건을 삭제했고, 벨기에와 네덜란드는 정신질환을 앓는 환자에게도 존엄사 자격을 부여한다.

1940년대부터 존엄사가 합법이었던 스위스와 달리, 우리나라는 이 문제에 관해 아직 사회적 논의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태다. 이미 죽음이 임박했으며, 남은 삶이 스스로 생각하기에 무의미와 고통으로 가득한 사람에게 편안하고 품위 있는 죽음을 허용하자는 취지에는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인간의 ‘죽을 권리’를 법제화하는 일은 필연적으로 논쟁을 수반한다. 특히 의료계에서는 해당 법안에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다. 무엇보다 생명 경시 풍조를 만연하게 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책에서도 이와 비슷하게, 조력자살이 하나의 선택지가 되면 취약 계층 사람들을 사회적 타살로, ‘값싼 죽음’으로 내몰 수 있다는 의견을 인용한다. “나이 들고 쇠약하고 장애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죽을 권리가 죽을 의무로 변질될 것”이라는 우려다.

이 문제적 주제에 대한 생각은 다양하겠지만, 기대수명이 늘어나면서 전체 수명의 20% 정도를 질병에 시달려야 하는 운명에 놓인 우리 모두가 고민해 봐야 할 주제임은 분명하다.

[독서신문 김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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