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질 결심’, “재밌어? 재미없어? 알고 보면…”
‘헤어질 결심’, “재밌어? 재미없어? 알고 보면…”
  • 김혜경 기자
  • 승인 2022.08.25 06: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흥행은 예상 외로 부진했지만 ‘n차 관람’ 열풍은 올해 개봉한 어느 영화보다 뜨거웠다. 뜯어볼수록 흥미로운 영화, <헤어질 결심>. 영화에 영감을 준 책과 이야기들을 읽은 후 『헤어질 결심 각본』을 읽어 봤다. 이미 ‘헤결’에 흠뻑 빠진 사람, 조금은 거리감을 느끼는 사람 모두에게 작은 길잡이가 되길 바라며.

중국의 고대 신화집, 산해경(山海經)

영화 <헤어질 결심> 스틸컷

“이 산의 봉우리는 깊이 감추어져, 보려고 하지 않는 사람에겐 보이지 않는다.”

형사 해준(박해일 분)은 수사를 끝낸 변사자의 중국인 아내 서래(탕웨이 분)에게 호감을 느끼고 자처해서 간병 일을 돕다, 미심쩍은 부분을 발견해 그의 남편이 떨어져 죽은 구소산에 다시 오른다. 사건 당일 서래의 행적을 하나하나 몸으로 더듬으며 서래가 되어 본다. 험난한 등반 끝에 ‘마침내’ 퍼즐이 맞춰지듯 진실이 드러난다. 수사 당시 함께 산에 올랐던 후배 형사 수완(고경표 분)은 “쉬운 코스도 있다는데 왜 굳이 이리로” 올라가야 하냐며 툴툴댔지만, 최연소로 경감이 된 해준의 유능함은 편견 없이 사건의 진실을 직면하려는 태도에서 비롯한다.

서래는 죽은 엄마가 일러 준 자신의 산을 찾아 한국에 왔다.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외할아버지가 남긴 산. 이 산은 이방인인 서래의 뿌리이자 뿌리깊은 콤플렉스다. 서래는 엄마와 외할아버지의 유골을 뿌리러 간 호미산에서 담담히 말한다. “(내가 해준 씨 같은 바람직한 남자와) 얼굴 보고 한마디라도 하려면 살인 사건 정도는 일어나야 하죠.” 남들 눈에는 수상한 외국인일 뿐인 서래의 기구하고도 ‘꼿꼿한’ 본모습은 ‘보려고 하는 사람’인 해준에게만 입체적으로 드러난다.

해준이 진실을 발견하는 계기가 된 서래의 ‘녹색 공책’은 중국의 가장 오래된 신화집인 산해경의 필사본이다. “여러 세대에 걸쳐 조금씩 이어서 쓴 책”이라는 서래 모의 설명처럼, 실제로 산해경은 저자가 명확하지 않고 집필 시기도 장마다 다른 책이다. 서래는 외할아버지가 뒷부분을 지어내며 옮겨 쓴 책에 자신만의 이야기를 덧붙였다. 서래의 산해경은 직접 쓴 자신의 신화다. “그 벌레가 떨어져 죽으면 터진 머리에서 이만 마리 황금색 파리 떼가 날아올라 비로소 세상을 향해 간다.” 머리통이 터져 죽은 서래의 남편 기도수를 떠올리게 하는 문장이다. 벌레가 들끓는, 평범한 이에겐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죽음의 현장이 서래에게는 지독한 과거를 벗고 ‘비로소’ 자신이 될 수 있는 장소였다.

북유럽 추리소설의 고전, 마르틴 베크 시리즈

영화 <헤어질 결심> 스틸컷

“호기심 많은 서래, 책을 하나하나 살핀다. 마르틴 베크 시리즈 사이에서 초보자를 위한 중국어 교재를 발견하고…” 영화에서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가듯 등장하는 해준의 책상에는 60~70년대 스웨덴 추리소설인 마르틴 베크 시리즈가 꽂혀 있었다. 박찬욱 감독은 이 시리즈에서 영감을 얻어 해준이라는 인물을 그렸다고 밝혔다. 마르틴 베크는 유능한 형사지만 셜록 홈즈처럼 천재적인 직관을 사용하지도, 한국 미디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사처럼 습관적으로 위압적인 분위기를 조성하지도 않는다. 법과 절차를 중시하며 철저히 증거와 논리에 입각해 수사를 전개해 가는 모습이 해준과 꼭 닮았다.

작가 마이 셰발은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인 『로재나』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처음에 시리즈의 부제를 ‘범죄 이야기’라고 붙였는데, 범죄란 말을 사회가 노동계급을 버렸다는 뜻으로 사용했다”고 말했다. <헤어질 결심> 속 범죄도 이와 비슷한 성격을 지닌다. 일용직에 가까운 형태로 일하며 남편에게 학대당하던 외국인 노동자 서래를 비롯해 또 다른 살인 사건의 용의자인 산오(박정민 분), 서래의 남편을 살해하겠다고 협박하는 사철성(서현우 분) 등은 모두 하층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사회는 그들의 죄를 묻지만, 그들이 겪는 구조적 억압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 눈물을 머금고 ‘내가 그렇게 나쁘냐’고 묻던 서래의 모습이 유독 씁쓸하게 남는 이유다.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영화 <헤어질 결심> 스틸컷

죽은 연인 에우리디케를 되찾기 위해 산목숨으로 저승에 발을 들인 음유시인 오르페우스. 특기인 리라 연주로 저승의 신들마저 감동시켰지만, 이승에 다다를 때까지 뒤를 돌아봐서는 안 된다는 약속을 실수로 어겨 또 한 번 연인을 잃고, 남은 평생을 슬픔에 갇혀 보냈다. 용맹하고 능력도 출중한 오르페우스가 저지른 최후의 실수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보여준다.

유능하고 품위 있는 형사인 해준 역시 허망하게 연인을 잃고 만다. 해준은 재난 같은 사랑 앞에 목숨처럼 여기던 형사로서의 긍지를 포기했지만, 책임감으로 유지되던 아내 정안(이정현 분)과의 관계는 스스로 끝내지 못했다. 서래와 함께한다면 감내해야 할 위험과, 안정적인 중산층의 삶 사이에서 선택을 유보했다. 그 비겁함이 평범한 인간 해준의 한계다.

그러나 수동적으로 그려진 신화 속 에우리디케와 달리, 서래는 사랑 때문에 ‘붕괴’되어 가는 연인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선택을 했다. 바다에서 이성을 잃고 서래를 찾아 헤매는 해준이 과연 ‘붕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사랑은 용맹한 행동”이라 말하던 서래의 ‘헤어질 결심’이 그 누구보다 용감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독서신문 김혜경 기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비회원 글쓰기 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서초구 논현로31길 14 (서울미디어빌딩)
  • 대표전화 : 02-581-4396
  • 팩스 : 02-522-6725
  • 청소년보호책임자 : 권동혁
  • 법인명 : (주)에이원뉴스
  • 제호 : 독서신문
  • 등록번호 : 서울 아 00379
  • 등록일 : 2007-05-28
  • 발행일 : 1970-11-08
  • 발행인 : 방재홍
  • 편집인 : 방두철
  • ⌜열린보도원칙⌟ 당 매체는 독자와 취재원 등 뉴스 이용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 반론이나 정정보도, 추후보도를 요청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두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고충처리인 권동혁 070-4699-7165 kdh@readersnews.com
  • 독서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독서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readersnews.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