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미레의 육아에세이] 아이 삶에 배경을 놓는 일
[스미레의 육아에세이] 아이 삶에 배경을 놓는 일
  • 스미레
  • 승인 2022.08.08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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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무르익어 간다. 그새 쟁글쟁글해진 매미 소리, 뺨에 수직으로 내리꽂히는 햇발. 가을 문턱에서 여름이 막무가내로 달려든다.

올해는 셰익스피어 베케이션이다.(책 읽는 휴가) 나야 선풍기와 책만 있으면 여기가 천국이려니 하는 사람이지만 내 곁에 아홉 살은 그렇지가 않은 모양이다. 유독 더위를 타는 아이가 안쓰러워 그 앞에 청포도 주스 한 잔과 나의 여름 화가, 라울 뒤피의 그림들을 밀어 놓았다. 얼음이 입안을 구르는 청량한 소리와 뒤피의 푸른 선이 주는 적확한 만족. 눅진 여름이 또록또록 색을 입는 순간이다.

페이지 사이를 거침없이 내달리던 아이도 몇몇 그림 앞에선 어쩔 수 없다는 듯 눈을 맞추고 숨을 참는다. 때마다 나도 숨을 잠그고 과연 아이 눈길을 붙든 게 무얼까, 헤아려보는 재미를 누린다. 그림을 본다는 건 말 없는 장면으로부터 누군가의 이야기와 마음을 넘겨받는 일. 아이에겐 되도록 작가의 좋은 시절과 맞닿은 작품들만 권하고픈 이유다.

라울 뒤피는 바닷가에서 유년을 보낸 화가다. 때문인지 넘실대는 파도와 줄 이은 요트들이 그의 든든한 그림 밑천이 되어주었다. 또한 뒤피는 음악가 집안의 사람이었다. 그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악보나 악기들을 보노라면 달콤한 실내악이 귓가에 감겨드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리곤 이 사물들은 분명 화가에게 다정한 것들이었을 거야. 나도 모르게 생긋한 표정이 되어 그런 생각을 하고 만다. 집안을 메우는 소담한 꽃과 반듯한 악기들, 언제까지나 들려올 것만 같은 음악 소리와 가족의 대화 소리, 그날 햇빛의 온도과 대기의 질감까지. 어린 뒤피를 둘러싼 모든 것이 그 자신 안에서 시간을 먹고 무럭무럭 자랐을 터였다.

그렇게 한 사람 안에 쌓여오다 그림이 된 것들을, 우리는 본다. 화가들은 대개 이런 방식으로 내게‘어린 시절의 심상은 힘이 세요’라 속삭이는 사람들이다. 과거에 감각했던 정경은 곧잘 정서의 근간이 되며, 나아가 평생 한 개인을 특징지을 수도 있는 무엇이라는 귀띔을 내 두 손에 꼭 쥐어주는 사람들.

“엄마 우리도 그림 그릴까요?”

마침내 아이가 도록을 덮고 일어났을 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기억을 그림으로 표현하지 못할 뿐, 내게도 분명 나 모르게 내 안에 새겨진 것들이 많았을 거라고.

“엄마는 뭐 그릴래요?” 아이가 내게 도화지를 내민다. 방금의 상념 탓인지 빈 종이 위로 과거로부터 건너온 풍경들이 둥실둥실 떠다닌다. 어릴 적 살던 집엔 오래된 물건이 많았다. 지금도 친정에 들어서면 인자한 얼굴로 우리를 반기는 130살 먹은 괘종시계, 엄마가 대학 시절부터 품어왔다던 헤세와 전혜린의 책들, 내 최초의 기억에도 푸르게 남아 있는 벤자민, 주목, 군자란 같은 이름의 화분들. 부모님의 물건이지만 그렇게 내 유년에도 속해있는 것들이 데구루루, 꼬리를 물고 쏟아져 나온다.

문득 눈을 깜빡이고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새 내 물건들이 모두 ‘엄마의 물건’이 되어 있다. 미미 인형, 머리 방울, 샤프와 볼펜의 시기를 지나 전공서, 립스틱, 뾰족구두의 시기를 거쳐 지금은 세간살이와 육아용품이 내 물건인 시기다. 아아, 이토록 둥글고 순한 것들이 내 물건이라니. 괜히 낯이 간지러워 손등이나 한번 꼬집어본다.

지금 나를 둘러싼 것들. 그러니까 이 물건들이 아이에겐 ‘엄마 물건’이다. 훗날 이들과 비슷한 사물을 보면 아이는 나를 떠올릴 것이다. 해서 그것들이 대체로 곱고 정다웠으면, 하는 바람이 매일 새로 포개진다. 어쩌면 집안 꾸리는 사람 최선의 도리이자 책무로 여기기도 한다. 내 살림, 내 물건을 장만하는 일은 결국 아이 삶에 배경을 놓아주는 일이니까. 그게 무엇이 될지 지금 나로선 분간할 수 없지만, 이 중 어느 하나는 아이 기억에 평생 머물게 될지도 모르니까. 집안의 가구는 물론 마당의 화초, 흔히 쓰는 컵이나 연필 등 소품 선정에도 퍽 마음을 쓴다.

생활을 대하는 자세와 표정, 곁에 두고 매일 쓰는 사소한 것들을 고르는 마음가짐이야말로 부모가 자식에게 남겨줄 무형의 유산이 아닐까. 결국, 작고 따스한 것들이 남는다. 나보다 젊으셨던 부모님이 한때 곁에 두셨던 물건들이 번지고 스미어 마침내 여기, 내 안에 안착했듯이.

 

 

■ 작가소개
- 스미레(이연진)
『내향 육아』, 『취향 육아』 저자. 자연 육아, 책 육아하는 엄마이자 에세이스트.
아이의 육아법과 간결한 살림살이, 마음을 담아 밥을 짓고 글을 짓는 엄마 에세이로 SNS에서 많은 공감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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