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포포엠 창시한 이민호‧차순정 “당신이 잃어버린 장소감, 그 섬에 있습니다”
토포포엠 창시한 이민호‧차순정 “당신이 잃어버린 장소감, 그 섬에 있습니다”
  • 안지섭 기자
  • 승인 2022.08.0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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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은 장소감을 잃어가고 있다. 한때 집이나 동네를 떠올리면 따뜻하면서 애잔한 느낌이 들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도시화가 진전될수록 그런 감정은 사라지고 있는 상황. 빽빽한 고층 빌딩이 들어선 현대의 도시에서 인간적인 향수를 느끼기는 어렵다.

<독서신문>은 지난해 10월부터 ‘차순정과 이민호의 토포포엠’이라는 코너를 연재하며 우리 안에 숨어있던 장소감을 불러일으켰다. 장소를 의미하는 단어 토포스(topos)와 시를 뜻하는 ‘포엠(poem)’의 합성어 토포포엠은, 우리말로 직역하면 ‘장소시’ 혹은 ‘장소에 관한 시’가 된다. 차 작가와 이 시인은 그동안 서울, 부산, 정선 등 40여 개의 ‘장소’에 대한 그림과 시를 연재를 통해 독자들에게 선보였다. 이들이 지난 20일 연재를 넘어 토포포엠을 집대성한 시집 『그 섬』을 출간했는데, 여기에는 아직 연재되지 않은 30개의 토포포엠을 포함하여 총 70개의 작품이 수록됐다.

시집 출간을 기념해 이민호 시인과 차순정 작가를 지난 26일 <독서신문> 사옥에서 만나 출간에 대한 소회를 물었다. 다음은 일문일답.

이민호 시인(좌)와 차순정 드로잉 작가 [사진=안경선 PD]
이민호 시인(좌)와 차순정 드로잉 작가

Q. 먼저, 자기소개를 부탁한다.

차순정 작가(이하 차): “청주 교대를 나와 35년간을 초등학교 교사로 일했다. 명예퇴직 후 드로잉(선으로 그리는 회화)을 배우면서 우리 주변의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다. 지인의 소개로 우연히 알게 된 이민호 시인이 ‘내 그림을 보면 시가 떠오른다’고 해서 토포포엠 작업에 참여하게 됐다.”

이민호 시인(이하 이): “시집을 내는 시인, 출판사 ‘북치는 소년’의 대표, 김수영문학관의 운영위원장,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 등 시와 관련된 여러 일을 하고 있다. 1994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서 등단했다.”

Q. 이번 시집 제목이 ‘그 섬’인데, 어떤 의미를 담고 있나.

이 : “정현종 시인의 ‘섬’이라는 시에서 영감을 얻었다. 그 시의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이 있다 / 그 섬에 가고 싶다’라는 구절이 강렬한 인상을 줬다. 우리는 늘 인간 관계 속에서 힘들어하고 또 그리워한다.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섬은 인간적인 어떤 장소인 것 같다. 나는 차 작가의 그림을 처음 봤을 때 마치 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언젠가 돌아가야 하는 고향같은 느낌. 그냥 섬이라고 지으면 정현종 시인의 시 제목과 겹치니 앞에 ‘그’를 붙여 ‘그 섬’이라고 지었다.”

Q. 토포포엠이란 정확히 무엇이며, 또 어떤 의도에서 만들어진 건지 궁금하다.

이 : “우리는 흔히 공간과 장소를 혼용해서 사용하지만, 사실 둘은 아주 다르다. 공간, 즉 스페이스(Space)는 의미가 부재한 물리적 공간으로 정의할 수 있는 반면, 장소를 뜻하는 ‘플레이스(Place)’는 스토리와 인연 그리고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결국, 토포포엠에서의 ‘토포’는 플레이스가 갖고 있는 의미에 맞고, 토포포엠 역시 특정 장소와 인간의 기억에 관련된 시일 수밖에 없다. 토포포엠이라는 장르는 우리가 세계 최초로 만든 것이라고 강조하고 싶다.

물론, SNS에서 장소와 시를 같이 병렬해놓는 ‘디카시’가 있긴 하다. 디지털 카메라로 한 장소를 찍고 그 곳에 대한 감상을 시로 적어놓은 것이다. 하지만 디카시의 사진은 시를 이해하기 위한 도구가 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사람들이 시를 어려워하니까 사진으로 시의 의미를 설명해주려는 의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토포포엠에서는 서로 다른 예술 장르인 시와 그림이 독자적이고 대등한 관계에 놓인다. 이들이 예술적 승화를 이룬다는 점에서 다르다.”

[사진=안경선 PD]
[사진=안경선 PD]

Q. 시 한편이 만들어지는 데 어떤 과정이 있었나.

차 : “먼저, 마음에 드는 풍경이나 모습이 있으면 사진으로 찍고, 그 사진을 그림으로 옮겼다. 그릴 때에는 다섯 시간 정도 앉아서 그림에만 집중할 때도 있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그림들 중 이 시인이 일부를 골라 시로 썼다.”

Q. 사진이 시의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반면, 그림은 대등한 관계라고 설명했다. 그림이 그렇게 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 “그림과 시는 장르적으로 친연적이다. 어떤 면에서 시는 말로 쓴 그림이라고 볼 수 있다. 둘 다 사람이 직접 묘사하면서 보여준다는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또 차순정 작가도 그림을 그렸지만, 사실은 그림을 통해 시를 쓴 것이라고 생각한다. 차 작가는 잘 그리겠다는 욕심이나 어떤 의도 없이 순수하고 천진하게 그림을 그렸다.”

Q. 차순정 작가를 파트너로 택한 이유도 그의 순수성 때문인가.

이 : “차 작가는 예술을 처음 시작했지만 나는 등단한 지 25년이 넘었다. 고루해졌고 참신함이 떨어지는 느낌이다. 하지만 차 작가의 그림을 처음 봤을 때부터 신선한 에너지가 확 느껴졌다.”

[사진=안경선 PD]
[사진=안경선 PD]

Q. 차 작가의 그림은 전부 무채색으로 이뤄져 있는데 의도적인 건가.

차 : “나는 채색을 좋아하지 않는다. 실제 장면처럼 채색을 해서 사진처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이 : “시도 마찬가지다. 세밀 묘사를 하면 안 된다고 얘기들 한다. 그것은 사진 찍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자기 상상력을 발휘해 시를 쓰라고 말이다.”

Q. 수록된 시 중에 가장 인상에 남았던 시 혹은 그림이 있다면 무엇인가.

차 : “‘남태령 동천’ 등 지역 이름이 들어간 시가 읽기 편했다. ‘고향집 앞마당에’라는 시도 좋았다.”

이 : “차 작가가 그려놓은 그림 200점 중 78점을 선택해 토포포엠 시집으로 만들었다. 총 6부로 나뉘어져 있는 이 시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관련 있는 대목은 6부다. 내 어린 시절이 떠올랐던 곳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또한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 있는 그림 또한 상당히 좋은 그림이다. 특히 에필로그에 있는 소반 하늘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Q. 시집 출간과 관련해 토포포엠이라는 장르를 독자들이 어떻게 즐겼으면 하나.

차 : “내가 그림 그리는 걸 아는 지인이나 가족들에게 책 출간 소식을 알렸더니 ‘삽화 하셨네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다른 사람의 시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그림 설명을 추가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책을 막상 펼쳐보면 조금은 놀랄 수도 있을 것 같다. 시와 그림이 대등한 느낌을 주고 오히려 편집상 그림이 더 먼저 눈에 띄기 때문이다.”

이 : “토포포엠이라는 말이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아서 접근하기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결국, 토포포엠이 지향하는 것은 토포필리아(topophilia), 그러니까 장소(topos)에 대한 사랑(philia)이다. 장소에 대한 사랑과 그 감정을 같이 공유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이 용어를 특허내고 싶지는 않다. 많은 사람들이 디카시처럼 SNS에서도 올리고 나누어 봤으면 하는 바람이다.”

[독서신문 안지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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