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바른생활 루틴이’?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바른생활 루틴이’?
  • 김혜경 기자
  • 승인 2022.06.05 06: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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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틴’이 각광받는 시대다. 올해 초 발표된 한 설문 조사 결과에서 성인 10명 중 8명이 일상에서 자기만의 루틴을 실천하고 있다고 응답했으며, 김난도 서울대학교 교수는 『트렌드 코리아 2022』에서 올해의 트렌드 10가지 중 하나로 ‘바른생활 루틴이’를 꼽았다. 변동성 높은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초등학생들이 생활계획표를 짜듯 하루의 루틴을 짜서 일상을 규칙적으로 운영하며 성취감을 느끼고, 거기서 삶의 의미를 찾는다.
 
하지만 루틴에 긍정적인 면만 있는 건 아니다. 중국계 미국인 작가 링 마는 장편소설 『단절』에서 루틴에 지배당한 세계의 이면을 그렸다. 이 소설은 코로나19와 같은 전 지구적 전염병이 창궐한다는 설정에서 출발한다. 이 병의 증상은 루틴을 더 강력하게 따르게 되는 것이다. 감염자는 자신의 고정된 행동 양식, 즉 루틴을 극단적으로 반복하다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다. 

주인공 캔디스 첸은 뉴욕에 사는 중국계 미국인이다. 이민 2세들이 흔히 그렇듯, 어릴 때부터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려 왔다. 가만히 있으면 존재감이 희미해지는 대도시에서 자신의 쓸모를 찾으려고 애쓰다 보니 “루틴을 좋아하는” 사람이 됐다. 그러던 어느 날 전염병이 창궐하고, 회사는 직원들에게 재택근무를 허용하지만 캔디스에게는 대외적 이미지를 위해 회사에 계속 출근하는 마지막 인력이 되어 달라며 거액의 보상금을 제안한다. 

캔디스는 정말로 계약이 종료되는 날까지 회사를 지킨다. 셔틀버스가 운행을 중단한 이후에는 아예 회사에서 생활하기까지 한다. CEO도 떠난 텅 빈 회사에 홀로 남아 할 일을 찾아 헤매는 그의 모습에서는 굳은 의지가 엿보인다. 그러나 캔디스는 계약이나 돈 때문에 회사에 머무른 게 아니었다. 그저 그것이 루틴이었기 때문이었다. 캔디스에게 루틴이란 자신을 고용해 주는 시스템이 영원할 것이라는 믿음이자, 인간으로서 쓸모를 잃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였다.

전염병 상황의 악화로 회사가 운영을 멈추자, 더는 할 일을 찾지 못한 캔디스는 업무 시간마다 뉴욕 시내를 돌아다니며 유령 도시의 풍경을 블로그에 기록한다. 사람들이 모두 떠나거나 죽고 없는 도시를 꾸역꾸역 지키며 루틴에 따라 생활하는 그에게 누군가 이런 댓글을 단다. “당신이 그 병에 안 걸렸다는 것을 어떻게 믿죠?” 그렇다. 캔디스는 감염되지 않았지만, 루틴 병에 걸려 한 자리에서 옷을 개고 또 개는 옷가게 직원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소설에는 ‘일’에 대한 단상이 꽤 자주 등장한다. 뉴욕에 사는 사람들은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동시에 믿기지 않을 만큼 무의미한 일”을 하며 비슷비슷하게 살아간다. 이상한 건, “주 5일 일하는 평범한 일상을 착실히 따르다 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것이다. “사람은 일을 하지 않으면 미쳐 버린다”. 루틴에 익숙해져 텅 비어버린 머리가 다시 이런저런 생각과 고민으로 채워지는 과정은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미국의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책 『불쉿 잡』에서 ‘너무나 무의미해서 그 직업을 가진 사람이 사라져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할’ 일자리가 유지되는 이유를 분석했다. 여러 연구 결과에 따르면, 거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직업을 싫어하지만, 한편으로는 일을 통해 존엄성과 자존감을 회복했다. 소설에서도 말하듯, 도시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지루한 루틴을 따르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런 시스템에서 즐거움을 얻는 것이기도 하다.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이를 ‘현대 노동의 패러독스(역설)’라고 이름 붙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쓸모 있는 인간임을 증명하기 위해 쓸모없는 일을 무한히 반복해야 하는 현대인의 아이러니다.

소설 『단절』의 원제인 ‘Severance’에는 ‘단절’ 외에도 ‘퇴직’, ‘계약 해지’라는 뜻도 있다. 회사와의 계약이 만료된 이후, 캔디스는 처음으로 루틴을 벗어나는 선택을 해 본다. 물론 그 선택에는 자유만큼의 막막함이 뒤따른다. 하지만 덕분에 그는 신봉하던 루틴의 모순을 돌아볼 수 있게 됐다. 사회와의 단절이 두려워 오늘도 그저 루틴 속으로 스스로를 밀어 넣는 우리는, 진정한 자신과는 오래전 단절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 소설이 던지는 질문이다.

[독서신문 김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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