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미레의 육아에세이] 오늘이 그리는 기적
[스미레의 육아에세이] 오늘이 그리는 기적
  • 스미레
  • 승인 2022.05.12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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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셰익스피어라니! 드디어 셰익스피어였다. 몇 학기 전부터 설레며 그의 이름이 또박또박 새긴 책을 새가 알을 품듯 품고 다니던 참이었다. 멋 모르던 십 대 시절부터 셰익스피어 전문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덜컥 꿔왔으니, 이 수업은 내게 꿈과 현실이 뒤섞인 다른 차원의 세계인 것도 같았다.

그러나 그런 실감이 오래가지는 못했다. 요즘 영어와 하나도 닮지 않은 중세 영어는 너무 어려웠고 세상 쓸모없어 보였다. 실망이랄까, 낙담이랄까. 학기 내내 흐엉흐엉 울기나 하며 깨작깨작 책장을 넘겼다. 그렇게 울며 낯선 말들을 주워섬기던 시험 전야. 아빠가 방문을 두드리신 건 그 밤의 별이 남김없이 사라진 뒤였다.

“많이 어렵니?”
고개만 겨우 끄덕.
“교복 입은 네가 생각난다. 빨리 이런 걸 배우고 싶다고 맨날 노래를 불렀지. 그러니 얼마나 좋으냐, 지금. 그토록 꿈꾸던 순간을 살고 있는데.”

그렇게 셰익스피어에 대한 나의 꿈은 미수로 그쳤다. 이제는 셰익스피어보다 요리책과 그림책에 더욱 가까운 사람이 되었다, 나는. 그러나 영 잊지는 못하고 그의 책들을 여기저기 두고는 산다. 버드나무 그림자처럼 휘엉대다 사라진 나의 꿈과 이따금 눈 맞추며 살 수 있음에 감사하며. 좋은 시간에 조금씩 열어보고자.
그리하여 올겨울엔 햄릿이었다. 그러는 통에 생각하기를 나는 왜 그리 겁이 많았을까, 왜 그토록 쉽게 주저앉아 버렸을까. 한숨을 몇 번 내쉬는 사이 글쎄, 봄이 와 있었다. 아이와 꽃과 잎새들을 원 없이 만지고 노는 날들이 활짝 열린 것이다.

오늘은 싸리꽃 아래 그보다 뽀얗게 웃는 아이를 세워두고 사진을 찍는데 왜인지 그 모습이 낯설지 않다. 걸음걸음 맺혀오는 이 기시감이 뭘까 뭘까 하다 마침내 기억해냈다.

< 연유 빛 스웨터를 입은 아이와 쪽배처럼 봄 길을 걷고 싶다.
함께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읽어보는 것도 좋겠지. >

일기에 써넣던 스물둘의 봄을. 그때부터였을까? 아직 세상에 있지도 않던 한 아이를, 이후로도 한참 뒤에나 만나질 이 아이를 마음속에 그려봤던 건.
서성임을 이만 멎고 한달음에 집으로 돌아왔다. 책장 한 귀퉁이에서 책을 내어 오랫동안 마음에 재워둔 소네트 한 자락을 아이에게 읽어줬다. 종일 병아리처럼 삐악대던 녀석도 쫑긋, 토끼처럼 귀를 기울인다.

그대를 내 여름날에 비할까요?
그대는 그보다 더 사랑스럽고 온유합니다.
거친 바람이 오월의 사랑스러운 꽃망울 흔드는
여름 한 철 너무나 짧습니다. 
(…)

— 윌리엄 셰익스피어, 《소네트집》

낡은 책, 그리고 곱게 풀어진 석양과 내 무릎을 벤 아이의 동그란 얼굴 위로 오래전 셰익스피어의 날들이 뭉게뭉게 겹쳐온다. 울며 지샌 밤들과 수업이나 잘 들을걸! 통탄하던 무수한 아침들. 그럼에도 좋았다, 고 여기 적힌다. 책상에 턱을 괴고 앉아 이런 날―내 아이에게 소네트를 읽어주는―을 꿈꾸던 낮이 더 많았으니. 손에 쥔 게 고작 꿈꾸는 재주뿐인 사람에게 그보다 더 큰 행복은 아마 없었을 테니.

최근 나의 꿈은 이랬다. 아이가 건강하게만 태어나줬으면, 통잠 좀 자줬으면, 기저귀 좀 떼줬으면, 떼쓰지 않고 말 해줬으면, 씩씩하게 유치원에 가줬으면. 이런 것들에 온 마음을 간절히 걸고 또 걸던 하루, 하루들.
아이와 조붓이 앉아 식사다운 식사를 하는 게 꿈이던 시절이 또 한참이었다. 그러나 지나보니 흘리고 뱉고 돌아다니던 그 시기가 꿈이었다. 이제는 기억에서만 만날수 있는, 돌아보니 참 고운 꿈.

저녁엔 뚜걱뚜걱 우엉 밥을 짓고 달래 간장을 재었다. 봄이라고 이런 메뉴를 생각해내는 내가 어쩐지 기특했다. 옆에 단정히 앉아 야물게 숟가락을 놀리는 아이를 보니 그런 생각도 들었다. 지금이, 오늘이 바로 기적이구나. 조각 잠 아닌 한잠을 자고, 아이가 콧노래 부르며 학교에 가고, 식구들 모두 자기 자리에 앉아 도란도란 웃으며 밥을 먹는. 한때 너무도 간절하던 일들이 매 순간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지는 지금이야말로 어느 날 나의 꿈들이 기적처럼 이루어진 순간이라고.

봄밤이 여름으로 깊어간다. 어깨에 닿아오는 숨이 일순 곤하기에 이불을 매만져주는데 아이가 반짝 몸을 돌려 말한다.
“엄마, 아까 쉐이크피어 좋았어. 내일 또 읽어요. 안녕.”
잊을 만하면 들어서는 낯익은 꿈처럼, 평온하게.
매일 꿈을 이루며 산다. 지금 꾸는 꿈도 계절이 지나는 새에 다 이루어질 터다.

 

■ 작가소개

- 스미레(이연진)
『내향 육아』, 『취향 육아』 저자. 자연 육아, 책 육아하는 엄마이자 에세이스트.
아이의 육아법과 간결한 살림살이, 마음을 담아 밥을 짓고 글을 짓는 엄마 에세이로 SNS에서 많은 공감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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