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미레의 육아에세이] 빨강 머리 앤은 어떤 엄마가 되었을까
[스미레의 육아에세이] 빨강 머리 앤은 어떤 엄마가 되었을까
  • 스미레
  • 승인 2022.04.12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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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딸은 꼭 빨강 머리 앤 같아”

일기 쓰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엄마는 종종 말씀하셨다. 그랬던 것도 같다. 나는 앤처럼 공상을 즐기던 소녀였다. 물론 그 덕에 좀 덤벙댔을지는 모르지만 색색 빛깔 감정으로 바람 한 점, 물그림자 하나, 무엇도 쉽게 스쳐 지나가지 않고 마음 안에다 무늬를 그려 넣던 날들.

그토록 공감 가는 캐릭터였기에 앤에 대한 나의 애정은 각별했다. 내 삶의 어느 조각 위에 그녀의 모습이 겹쳐지면 즐거웠다. 길 양쪽으로 벚꽃이 환한 날, 퍼프 소매 블라우스를 입는 날이면 어김없이 그녀가 떠올랐다. 앤의 나중 이야기들, 그러니까 활자만 촘촘히 박힌 후편들을 만난 건 대학 도서관에서였다. 한순간 그녀도 나도 대학생이었다. 그게 어찌나 반갑던지 거기 선 채 마치 내가 매튜 아저씨나 마릴라 아줌마라도 된 양 “정말 잘 자라주었구나, 앤”하며 그녀의 빼빼 마른 어깨를 토닥여주는 상상을 했었다.

교생실습 나가던 내게 용기를 준 것도 다름 아닌 교사가 된 앤이었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연애편지를 쓰는 앤의 이야기를 읽을 때면 내 마음의 기온도 흠씬 올랐다. 그런데 이상도 하지. 앤이 결혼을 한 후로는 책장이 넘어가질 않는 것이었다. 결혼과 육아가 너무 멀게만 느껴져서였을까. 아쉬운 마음을 책갈피처럼 끼워 넣고 책을 덮었다. 그러므로 내가 아는 앤의 이야기는 거기까지였다. ‘앤은 길버트와 결혼해 엄마가 되었습니다.’

엄마가 되고야 문득 이 자리에 선 앤의 모습이 궁금해졌다. 앤은 이 일을 어떻게 해냈을까? 호기심을 가누지 못해 웹 검색을 하다 ‘앤은 몽상가라 아이들을 잘 돌보지 못했을 것’이란 어느 블로거의 단호한 예상과 마주치기도 했다. 주눅보다 먼저 놀라움이 들었다. 평생 호리호리한 소녀일 것 같던 앤이 무려 여섯 자녀를 둔 엄마라니! 걱정 반, 기대 반. 즐거운 설렘으로 책을 펼쳤다.

블로거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엄마가 된 앤과 그녀의 가족은 행복했다. 앤에겐 고아였다는 상처가 있지만, 그녀는 한 번도 버려진 적 없다는 듯 명랑한 엄마가 되어있었다. 자신이 받은 사랑을 소중한 이들에게 나눠주는 앤은 아름다웠다. 특유의 민감한 감수성을 토대로 아이 각자의 특별함을 포착하고 응원했다. 겁 많은 아이는 더욱 감싸주고 기운찬 아이는 도리어 북돋워 주었다. 이 아이 저 아이에게 들려줄 이야깃거리를 싸목싸목 챙기고 그들의 이야기를 곰곰 들어주는 그녀는 능력 있는 엄마라기보단 사랑받는 엄마였다. ‘이토록 좋은 엄마는 아무도 가지고 있지 않을 거야.’ 그녀의 아이들은 생각했다.

앤은 자신의 개성을 땔감 삼아 하루하루를 정성껏 풀어냈다. 그럼에도 그녀의 일상은 전처럼 극적이지 않다. 에피소드들은 인물들의 내면을 중심으로 잔잔히 펼쳐진다. 그녀의 뒷이야기들이 더 큰 유명세를 얻지 못한 건 그 때문이 아닐까? 앤의 시절이나 요즘이나 눈길을 더욱 끄는 건 화려한 치장이 겉으로 드러나는 쪽이니까. 더구나 ‘실용’이 모토인 육아 세계에서 ‘낭만’을 끌어안으려는 몽상가의 목소리는 얼마나 작게만 들리는지. 하얀 달밤 눈 내리는 소리처럼 귀를 바짝 기울여야만 겨우 듣게 되는 나직하고 영롱한 속삭임. 그런 목소리가 그리운 날 나는 앤의 이야기를 찾는다. 좋아하는 찻잔을 곁에 두고, 소매를 살짝 걷고. 아무 데고 펼쳐 읽으며 아 역시 즐겁구나, 한다.

“사랑이 활활 타오르고 봄을 앞두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불어오는 눈이나 찌르는 듯한 비바람을 걱정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리고 길에는 인생의 온갖 작은 아름다움이 뿌려져 있는데.”  『그린게이블즈 빨강머리 앤 Anne. 6: 행복한 나날』 中

앤은 여섯 아이를 키우는 소란에도 아름다움은 있으며 삶의 어디에나 행복은 흐른다고 말한다. 예컨대 가족의 미세한 기척, 새로 돋는 잎새의 천진함, 낯선 이의 작은 친절. 아무렴. 어느 시절이고, 어디서고 우리 삶은 이런 민민한 것들 틈에다 반짝임을 숨겨두곤 하는걸. 군인이 되겠다는 아들을 걱정하는 다이애나에게 건넨 앤의 말도 참 사랑스러웠다. “나라면 그런 일로 걱정하지 않겠어. 또 다른 생각에 빠지면 그런 건 잊어버리고 마니까. 전쟁은 과거의 것인걸, 뭐”라는 생각으로 생각을 잊는다. 얼마나 그녀다운 마음 정화법인지.

외부에서 ‘엄마’로 현존하는 고단을 잠시 잊고 내 안의 담요를 찾아 살며시 덮어보는 일. 앤은 생각에 빠져드는 일이 육아의 동력이 됨을 내게 깨쳐주었다. 덕분에 몽상에 잠길 때마다 들던 자책이 솜사탕처럼 녹아내린다. 언제부터였는지 나는 능률이 감상보다, 이성이 감성보다 우월하다는 자격지심을 앓고 있었다. 이성적인 사람들 틈에서 감성적인 내 존재는 쉽게 작아 보였고, 스스로도 그런 성향이 마뜩잖았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아이와 즐겨 보던 책 중에 어느 다리에 관한 책이 있다. 그 책을 읽을 때마다 나는 아이에게 그 다리에서 본 노을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오래전에 거기서 본 그 노을이 잘 익은 홍시처럼 유난히 발갛고 환해서 마음속에 저장해두고 가끔 꺼내 본다는 뭐 그런 이야기. 아이가 하품을 하면 그제야 감상에서 깨어났다. 책장 넘기는 것도 잊은 채 감상에 빠져든 내 모습이 미안하고 부끄러워 두 뺨이 훅 더워졌다. 그러던 어느 오후 창밖을 보던 아이가 나를 부른다.

“엄마, 노을 좀 보세요. 엄마가 금문교에서 본 노을도 저랬어요? 나는 오늘 노을 마음에 저장해 놓을래. 엄마도 저장해요. 엄마랑 같이 꺼내 보면 더 좋을 거야” 그리고 그때마다 조금씩 더 행복해질 것이었다. 늦봄, 서울 하늘에 드물게 맑고 붉은 노을이 걸린 날이었다.

“자유자재로 자기의 아름다운 세계로 달려갈 수 있는 힘을 갖는다는 것은 세상의 괴로운 데를 지나갈 때 놀라우리만큼 도움 되지. 나는 마술의 힘으로 한두 번 항해했다가 돌아오면 어려운 일들을 좀 더 쉽게 해결할 수 있었어.”  『그린게이블즈 빨강머리 앤 Anne. 6: 행복한 나날』 中

언제라도 접속할 수 있는 내면이 있다는 것, 견고한 일상 중에도 꿈에 젖을 수 있다는 것. 그렇게 모은 사소한 조각들로 비단처럼 보들보들한 행복을 자아낼 수 있다는 것. 나 같은 이가 받은 최고의 축복일 테다.

 

■ 작가소개

- 스미레(이연진)
『내향 육아』, 『취향 육아』 저자. 자연 육아, 책 육아하는 엄마이자 에세이스트.
아이의 육아법과 간결한 살림살이, 마음을 담아 밥을 짓고 글을 짓는 엄마 에세이로 SNS에서 많은 공감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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