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웠던 언덕을 비켜서서
뜨거웠던 언덕을 비켜서서
  • 김혜식 수필가/前 청주드림 작은도서관장
  • 승인 2022.04.25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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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식 수필가/前 청주드림 작은도서관장

와인에 푹 빠졌다. 프랑스 부르고뉴의 화이트 와인인 ‘몽라셰’ 맛에 반했다. 보르도 레드 와인 ‘페트뤼스’ 맛에도 매료됐다. 이 와인들은 고가라서 마음껏 즐길 수 없어 아쉽다. 연도에 따라 가격이 비싸기 때문이다.

경제적 부담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일 년에 한, 두 번 가족들과 ‘몽라셰’ 와인으로 잔을 기울이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이 때 소크라테스가 철학자들과 와인을 마시면서 심포지엄을 열었던 그 광경을 흉내 내는 여유도 한껏 부려본다. 당시 참석자들은 와인에 매혹돼서인가. 그날 일들을 전해 주는 ‘대화록’에 의하면 그들은 신(神) ‘에로스’를 찬양하면서 사랑을 주제로 ‘갑론을박(甲論乙駁)’을 벌였다고 하잖은가.

포도주 향연을 연례 집안 행사로 벌이기로 계획한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바쁜 삶 속에서 식구들과 미처 나누지 못한 대화의 시간을 갖기 위함에서다. 남편, 딸들과 와인을 마시면서 허심탄회하게 미래지향적인 설계를 하고자 한다. 사실 젊은 날엔 매사 미숙하다. 딸들의 이런 설익은 삶의 이야기, 고충에 함께 공감하노라면 다시금 자신을 성찰하는 계기도 마련됨을 깨닫는다. 솔직히 이 나이 이르도록 아직도 절차탁마(切磋琢磨)가 덜 돼서인지 필자 역시 불완전한 면이 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을 깊이 응시하는 기회이기도 하잖은가. 또한 그동안 소홀했던 가족들과의 시간을 비싼 술에 기대어 벌충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 날만큼은 몽라셰를 즐긴 영화감독 히치콕의, “대화란 좋은 와인의 적(敵)” 이란 말이 실감나지 않을뿐더러 고액인 포도주 값도 결코 아깝지가 않다.

이즈막 연도수가 얼마 안 된 포도주이지만 혼자서도 수시로 잔을 기울이곤 한다. 평소 술은 단 한 방울도 못 마신다. 하지만 왠지 와인의 유혹만큼은 떨칠 수 없다. 이는 와인이 지닌 속성을 흠모해서다. 필자 역시 와인을 닮고자 한다. 포도주는 묵을수록 높은 진가를 지녔잖은가. 인간도 와인처럼 세월이 흐를수록 절로 성숙해져 격조 높은 인격을 갖췄으면 좋겠다. 이 생각에 이르자 언제부터인가 자신을 깊이 응시하는 시간이 부쩍 잦아졌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자문을 수없이 해보지만 우매함 탓인지 정답은 점점 멀어지는 느낌이다. 뜬금없이 자화상에 대하여 진솔한 토로를 하고자 함은 그동안 자신을 올바르게 간파하는 데는 게을렀다는 생각에 의해서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현 상황에선 인생의 귀결에 대하여 함부로 말할 순 없다. 그럼에도 ‘나’를 제대로 바라보려는 노력을 애써 해본다.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니 다면체의 정체성을 안고 살아온 듯해서다. 평소 매사 원칙주의자이고 곧은 의식으로 변칙, 편법을 경계해 왔지만 따뜻한 정 앞엔 가슴을 활짝 열어젖히는 단순함이 있었다. 불의를 보면 주먹을 불끈 쥐다가 불이익도 당하였다. 자존심을 다치는 일엔 매우 냉철했다. 심지어는 자존심을 짓밟은 사람과는 절연까지 할 정도니 결코 너그럽고 수더분한 성품만은 아닌 성 싶다.

그러고 보니 아직도 필자는 미숙아인가 보다. 이제라도 숙성시킬수록 맛이 깊어지는 포도주를 본받아야 할까보다. “신은 물을 만들었을 뿐이지만 인간은 와인을 만들었다”라는 빅토르 위고의 말을 떠올리며 와인을 마시는 저녁나절, 붉어지는 석양을 바라보노라니 문득 보들레르의 ‘포도주의 영혼’이라는 시어가 가슴을 뒤흔든다.

‘어느 날 저녁, 포도주의 혼이 술병 속에서 노래하더라 / “사람아, 오 불우한 자여, 유리의 감옥 속에, / 진홍의 밀납 속에 갇혀서, 내 그대 향해 목청 높여 부르노라, / 빛과 우정이 넘치는 노래를 / 나는 알고 있나니, 내게 생명을 주고 영혼을 주려면, / 저 불타는 언덕배기에서 얼마나 많은 고통과… (생략)’

이 시의 ‘불타는 언덕배기’라는 시어를 대하자 문득 고단했던 필자의 젊은 날과 오랜 세월 견뎌온 포도주의 숙성이 환치되는 느낌마저 든다. 정말 그랬다. 오늘날이 있기까지 지난날 혹독한 삶의 담금질이 있었다. 결혼 후 오롯이 남편 외조와 세 딸들 양육에 혼신을 다하였다. 이젠 그토록 뜨겁고 치열했던 생의 언덕을 잠시 비켜서 이처럼 여유롭게 포도주 맛을 음미하노라니, 날이 갈수록 필자의 와인 잔이 넘치는 이유를 알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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