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장자도 무너뜨리는 ‘착각’의 힘
백만장자도 무너뜨리는 ‘착각’의 힘
  • 안지섭 기자
  • 승인 2022.04.0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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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후반 미국에서 연서(戀書)를 활용한 사기 사건이 있었다. 범인은 수만 명의 남성에게 편지를 보내고 호감을 샀다. 상대에 따라 고유한 문체와 어휘를 사용한 편지에는 정성이 녹아들어 있었다. 남성 수신자들은 세심하게 작성된 이 편지를 여성이 썼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사랑에 빠진 이들은 편지에 적힌 범인의 요구를 계속 들어주었다. 수십만 달러를 보내기도, 자신의 부동산을 유증하겠다고 하기도 했다.

하지만 편지를 쓴 사람은 여성이 아니었다. 중서부 지방의 조그마한 도시에 사는 중년 남성 ‘도널드 로리’였다. 로리는 이 사기 수법으로 큰 성공을 거뒀다. 시내 중심가에 있는 사무용 빌딩 한 동을 통째로 사용하면서 50여 명의 직원을 고용했다. 연방 수사관들에 의해 범죄 수법이 들통나면서 그의 사기 행각은 마무리됐는데, 당시 그는 롤스로이스와 재규어를 포함한 스무 대의 자동차를 보유한 큰 부자가 돼있었다.

로리는 잡혔지만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사기 혐의 재판이 진행되고 있는 법원에 그간 그의 편지를 받았던 사람들이 몰려들어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뭐라고 외쳤을까. 사람들은 자신을 속이고 내 재산을 갈취한 범죄자를 감옥에 넣으라고 말했을까. 아니다. 그들은 로리의 편지 덕분에 자신의 인생이 더욱 나아질 수 있었다고 말했다. 로리의 편지 덕분에 자신이 마약 중독 혹은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났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으며, 어떤 남자는 “편지 검열이 내 인생을 망쳤다”고 욕하기도 했다.

책 『착각의 쓸모』의 저자 샹커 베단텀과 빌 메슬러는 이 사기 사건의 의미를 되짚는다. 그리고 이들은 ‘진실이 꼭 헛된 믿음보다 유용할까’라고 묻는다. 로리가 범죄를 저지른 건 맞지만, 피해자들에게는 삶의 위로가 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실을 아는 것이 착각이나 자기기만보다 반드시 더 좋은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보는 것은 오판일 수도 있다.

저자들은 “잘못된 믿음을 고수하는 일은 반드시 바보 같은 짓이 아니며, 병리학적 이상 징후나 악한의 징후도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로리의 사기 사건처럼 인간이 자기기만에 빠지고 진실을 의도적으로 외면하려는 사람들의 시도는 일종의 본능이다. 그러니까 그들이 결코 교육 수준이나 지능이 낮아서 발생하는 일이 아니다. 우리는 인간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존재’라고 여기지만, 알고보면 상식적이지 않은 구석도 많다. 사랑하는 사람을 마냥 좋게 보려고 하는 경향, 즉 ‘사랑의 콩깍지’나 무서워 하는 것을 실제보다 더 가까이 있는 것처럼 여기는 착각 등은 우리의 삶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착각의 현상들이다.

저자들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자기기만과 함께 살아가는 자세라고 강조한다. 수많은 지식인들이 이성과 합리성이 인간과 세계를 구원한다고 말하지만, 이들은 “어쩌면 착각은 편안함을 제공하고, 불안정성을 방어해줄 수 있다”고 말한다.

[독서신문 안지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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