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미레의 육아에세이] 가장 아날로그한 마음으로
[스미레의 육아에세이] 가장 아날로그한 마음으로
  • 스미레
  • 승인 2022.03.14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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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정에 막 다녀온 참이다. 으레 그렇듯 오늘도 식구들 손에 보따리가 주렁주렁 달렸다. 싸 온 것들을 제 자리로 옮겨가기 전, 거실 책상 위에 먼저 짐을 풀었다. 아빠가 넣어주신 비누, 엄마가 싸주신 반찬이며 과일들, 접시들. 이런저런 종잇조각들, 남편의 노트북, 아이의 전동차와 나의 책 몇 권이 사이좋게 뒤섞인다. 가만 보고 있자니 어쩜 하나하나가 꼭 오늘 우리 같은지 웃음이 났다. 네모난 책상 위. 여기가 우리의 작은 세상인가 봐.

처음엔 뽀로로가 그려진 앉은뱅이 밥상이 우리의 세상이었다. 연필을 혼자 쥐기엔 아이 손이 무르던 시절. 거기서 아이와 무언가를 그려나갈 때마다 완연한 세계 하나가 둥실 떠올랐다. 색연필 하나를 같이 잡고 차를 그리면 아이는“이 차는 빗물을 먹는 차야.” 했고, 토끼를 그리면“얘는 네 잎 클로버를 찾아요. 엄마 줄 거래요.” 했다.

그 많은 종이 꾸러미들을 지금껏 끌어안고 산다. 간간이 들여다보며 그때 우리가 종이 위에서 왈츠를 췄구나, 한다. 직선이든 곡선이든 내 맘대로 끌고 나갔다간 스텝이 엉키고 연필심이 부러질 것 같아 숨을 낮추던 날들. 안 그래도 그림엔 서툰 사람이라 땀도 비죽비죽 났었지. 하지만 둘이서 좋은 마음으로 함께 하는 순간의 기세에는 견고하고 아늑한 기쁨이 어려 있었다.

아이가 더 어릴 적엔 그림을 그리며 종알대는 건 순전한 내 몫이었다. 이건 기차야, 이건 집이야. 그렇게 아이와 백지를 마주할 때마다 그동안 당연히 안다고 착각했던 것들, 이를테면 사랑이나 시간 같은 것들을 풀어낼 재간이 내게 없음을 무참히 깨달았다. 동시에 소설 ‘대성당’이 떠올랐다. 맹인 손님에게 대성당의 생김을 설명해야 했던 주인공의 심정이 똑 이랬을 터였다. 그 역시 암만 애를 써도 대성당의 웅장함을 말로 다 설명할 수는 없었다.

마침내 주인공은 맹인과 손을 포개어 종이 위에 대성당을 함께 그려나간다. 이윽고 그들은 낱낱 흩어지는 각자의 언어가 아닌 공명하는 마음으로‘진짜 대단한’일을 해낸다. 손을 잡고, 한마음으로, 타인과 같은 풍경에 닿아가는 일.

내겐 아이와의 날들이 그랬다. 아이와의 시간은 하염없이 아이 손을 잡고 사는 시간이었다. 태어난 아기의 손가락을 세어보고, 그 고사리손을 보드라운 천으로 살살 감싸주던 날부터 시작되는 일. 조그만 아이 손에 습자지처럼 얇은 손톱이 있고, 그 꼭대기에 가늘고 흰 초승달이 돋는 걸 보며 무시로 감격하는 일. 꽃에서 고운 꽃 내음 나듯 아이에게도 그만의 향기가 있다는 것, 특히 아이 손에선 밤 잼이나 롤빵의 고습고 달콤한 향이 난다는 것도 내겐 퍽 신기한 일이었다.

몇 해간 그 달다란 손을 잡고 걷고, 뛰고, 기도하고, 책을 읽고, 밥을 먹고, 화초에 물을 주고, 옷을 입히고, 신을 신기고, 씻기고, 상을 차리고, 집안을 정돈했다. 손품 마음 품 공히 드는 모든 일. 그러니까 가장 아날로그 한 마음으로 하는 가장 아날로그 한 행위들을 우리는 매일 함께했다. 둘이서 한 호흡으로 작은 일이라도 해내면 무슨 대단한 작품을 만들어 낸 모양으로 어깨가 으쓱였다. 아이 손을 잡고 한 숟갈, 또 한 숟갈, 그렇게 밥 한 그릇을 다 먹였던 날에는 너무 기뻐 막 울면서 환호를 했더란다.

며칠 전 소슬한 기운에 약을 먹고 누웠는데 이불속으로 따스한 감촉이 느껴졌다. 아이였다. 아이는 내 이마를 쓸어보고 팔 베는 시늉을 하더니 곧 손을 잡아 왔다. 아서라 감기 옮는다, 하니 강아지 눈이 돼서는 그래도 손잡고 있을래 한다. 그러고 보면 내 찬 손과 아이의 따뜻한 손은 궁합이 좋아 어느 계절에나 우리는 손을 잡고 있었다. 순간 아차 싶었다. 손은 맞잡는 건데, 그동안 나는 왜 ‘나만’ 아이 손을 잡아줬다고 생각했지?

아이도 내 손을 잡고 있었는데. 지금껏 나 흔들리지 말라고, 지금도 충분하다고 도닥여준 게 이 작은 손이었구나. 아팠던 마음이 어느새 성해져 있곤 하던 것도 아이가 그 여린 손이 닳도록 나를 어루만져준 덕이었다. 아가, 너도 나를 보듬느라 무진 애를 썼구나.

다시 눈을 감자 한겨울 눈밭에서 서로를 꼭 끌어안고 있던 우리 셋이 보였다. 잠에 빠져들며 생각했다. 맞아. 가족이란 체온을 기꺼이 나누는 사람들이야. 마음속에서 따뜻한 무언가가 툭, 터지며 물결처럼 느리게 번져 올랐다.

오늘은 아이의 열 번째 생일이다. 이제 우리집엔 의젓한 원목 책상과 목단꽃만 한 손을 가진 소년이 있다. 이 고운 손으로 사랑만 베풀며 살길, 누구도 다치게 하는 일 없길. 미역국에 밥을 잘 먹고 따뜻해진 아이 손을 잡고 그렇게 기도했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식기를 싹 헹구고서야 10년간 엄마 손으로 쓰인 내 손과도 눈이 맞는다. 얼른 뜨뜻한 스팀 타올 두 장을 만들어 손을 감쌌다. 김이 식고는 향 좋은 크림을 바르고 손톱을 단정히 소재했다. 아이를 낳곤 무엇도 칠해본 적 없는 내 맨송한 손톱이 오늘따라 참 예뻐 보였다.

그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져 꽃집엘 날아서 다녀왔다. 겨우내 거실 책상 위를 호령하던 노트북을 치우고 홀홀한 리넨 보를 잘 다려 깔았다. 수선화 넘실대는 꽃병을 올리고 거기 앉아 뜰에서 불어오는 봄 내음을 마시며 생각했다. 새봄엔 어디나 사랑이 가득하고, 누구도 서로를 해할 수 없으며 모두가 평온할 거라고. 한들한들 책상 위에 내려앉은 봄기운처럼 마음이 맑게 빛났다.

 

■ 작가소개

- 스미레(이연진)
『내향 육아』, 『취향 육아』 저자. 자연 육아, 책 육아하는 엄마이자 에세이스트.
아이의 육아법과 간결한 살림살이, 마음을 담아 밥을 짓고 글을 짓는 엄마 에세이로 SNS에서 많은 공감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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