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
사과
  • 김혜식 수필가/前 청주드림 작은도서관장
  • 승인 2022.02.28 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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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식 수필가/前 청주드림 작은도서관장

무심코 발설한 말이 누군가에겐 평생 비수가 되기도 한다. 소심한 탓인지 타인이 건네 온 한마디 말이 아직도 가슴에 똬리를 틀었다. 수년 전 단체 회원과 떠난 어느 여행지에서 겪은 일이다. 마침 관광을 끝내고 화장실을 다녀올 때다. 저만치서 회원 몇몇이 서서 손짓을 한다. 그 부름에 선뜻 응했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곳 서, 너 명 회원 중 한 여인이 대뜸 필자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그러면서 “브라자 컵이 찌그러졌다”라고 말한다. 갑자기 그녀의 지적을 받자 당황스러웠다. 무엇보다 그 곁에 함께 자리한 몇몇 남정네들 보기에 민망했다. 그네들 시선이 필자의 가슴에 일제히 내리꽂히는 바람에 순간 얼굴이 화끈했다.

그녀의 말을 듣고 다시금 화장실로 뛰어가서 거울을 통해 가슴을 살폈다. 그날 초가을 날씨였으나 매우 후텁지근했다. 겉옷을 벗은 채여서 그녀 말 대로 얇은 티셔츠 밖으로 오른쪽 가슴 브라자 컵이 찌그러진 게 도드라졌다. 하는 수없이 궁여지책으로 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일그러진 브라자 컵을 펴보려 애썼다. 하지만 이미 훼손된 브라자 컵은 원상 복구가 어려웠다. 부리나케 걸음을 재촉하여 관광버스 안에 벗어놓은 겉옷을 걸침으로써 가슴을 완벽히 가릴 수 있었다.

그날 관광할 기분이 망가진 느낌이었다. 정녕 필자의 옷매무새가 눈에 거슬렸다면 조용히 귓속말로 말해줘도 충분히 인지할 일 아닌가. 그럼에도 교양 없이 드러내놓고 공개적으로 말했다. 심지어 남성들도 여럿 있는 데서 말한 것이 목에 가시처럼 걸렸다. 가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까지 큰 소리로, “브라자 컵이 찌그러졌다”라고 말했잖은가. 이즈막도 지난 일을 곱씹을수록 그녀가 못내 괘씸하다.

여성의 속옷은 수명이 그리 길지 않은 듯하다. 아무리 비싼 속옷도 몇 달만 사용하면 자칫 형태가 훼손되기 일쑤다. 특히 브라자 같은 경우는 세탁을 부주의 하면 와이어도 손상되고 컵도 쉽사리 변형되곤 한다. 그날 아침 일찍 관광버스가 대기 중인 장소에 서둘러 나가느라 미처 속옷 상태를 확인 못하고 착용한 불찰은 인정 한다. 하지만 그녀 말로 말미암아 필자가 심한 성적 수치심을 느꼈으니 사과는 정당하다.

그 이후 마음이 도무지 안 풀려서 커피숍으로 그녀를 불렀다. 평소 친분도 그다지 없는 그녀를 갑자기 불러냈다면 눈치는 챘을 터, 여인은 그날의 일을 먼저 사과해 오지 않았다. 해서 새삼 지난 이야기를 꺼내기도 왠지 내키지 않아 엉뚱한 수다만 떨다가 헤어졌다. 생각이 있는 여성이라면, 이후에라도 그날 자신의 경솔함을 뉘우치며 내게 정중히 사과를 했어야 도리 아닌가. 하지만 몇 년이 흐른 지금껏 말 한마디 없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저지른다. 하지만 자신의 실수를 나중에라도 뉘우치고 상대방에게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해온다면 얼음장 같았던 마음이 다소 풀릴 일이다. 그럼에도 여태껏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사과는 진정성이 생명이다. 온갖 잘못을 다 저지른 후, 알맹이 없는 빈 말로, “미안하다” 따위는 사과와는 거리가 멀다.

신달자 시인은 어느 글에서 외국인이 본 한국인의 독특한 사과 방식에 대하여 언급했다. 그 외국인이 본 한국인들은 어지간한 잘못에는 미안하다는 말을 잘 안한다고 했다. 실수를 저질러 놓고 어쩌다가 어렵사리, “잘못 했다”라고 사과 하면 상대방이 “아니라고, 무엇이 미안 하냐” 라고 손사래를 친단다. 그러고 나면 모든 것이 끝나더라고 말했단다.

이 내용을 읽은 후 이는 쉽게 잘못을 저지르는 무례와 이에 못지않게 빠른 화해를 이루는 게 우리네라는 뜻이기도 하여 생각하는 바가 자못 컸다. 어쩌면 필자도 그녀가 자청하여 지난 일을 뉘우쳤더라면 웃는 얼굴로,“ 별거 아닌데 괜찮다” 라고 아주 너그럽게 그녀의 사과를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한편 필자 역시 타인에게 생각 없이 건넨 말 한마디, 신중하지 못한 행동으로 많은 폐를 끼치고도 입버릇처럼, “미안하다” 라고 말만 한 적은 없었는지 새삼 자신을 성찰해 본다.

평소 가급적 타인에게 그릇된 언행으로 피해를 입혀 사과하는 일은 행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걸핏하면 실수 및 오류를 저지르기 예사다. 그래 인간은 불완전한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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