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미레의 육아에세이] 나에게 다정히 건네는 인사
[스미레의 육아에세이] 나에게 다정히 건네는 인사
  • 스미레
  • 승인 2022.02.09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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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오랜만이다. 아이가 학교에 가는 날. 몇 달 만에 갖는 고요한 아침에 무얼 할까, 어딜 가볼까, 그런 설렘이 초여름 구름처럼 난만하여 나는 이틀 전부터 잠을 설쳤다.

아침은 작은 소란이었다. 가방을 세 번쯤 새로 보듬고 세수를 두 번이나 한 후에야 아이는 팔랑팔랑 학교로 향했다. 갑자기 텅 빈 집. 문득 휑해져서는 두툼한 카디건과 울 양말을 도로 내어 걸치고는 잠시 주저앉아 와아아 쏟아져 나오는 상념들을 펼쳐보다 돌이켜 씩씩해진 건 더운 빵과 커피를 마주한 뒤의 일이다. 자, 이제 뭐라도 써볼까? 달싹이는 손끝을 핑계 삼아 노트를 열고 꼭꼭 눌러 적는다. - 청소를 하지 말 것. 빨래 더미를 무시할 것. 종일 잠옷을 입고 있을 것. 책을 잡지 말 것. 오늘 나의 할 일이다.

맞다. 나는 그저 여기 앉아 새 소리나 더 들을 참이었다. 분명 그랬는데 어느새 몸이 책장 앞이다. 시절이 책 한 권을 부르고 있었으므로.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연애 소설을 즐기지 않는 나에게 작가 프랑수아즈 사강을 각인시킨 소설. 새들새들 꽃 그림자 같은 그녀의 문장을 처음 접한 건 3월의 캠퍼스에서였다. 아직 녹지 않은 눈과 새로 핀 꽃이 사이좋게 뒤섞인 계절을 닮은 달콤함과 알싸함. 사강을 마음에 두지 않을 도리란 없겠구나, 깨우치던 그 날처럼 창가에서 책을 펼쳤다.

‘오늘 6시에 아주 좋은 연주회가 있습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얼마나 많은 이가 여기다 꽃 갈피를 꽂아뒀을까? 나 역시 그랬다. 이 문장을 얼마나 즐겨 찾았던지 책을 열면 너무도 무르게 이 페이지에 닿곤 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간결한 문장에 담긴 시몽의 뜻, 폴과 함께 연주회에 가고 싶다는 그의 설렘은 네모난 강의실에 앉은 내 마음마저 흐드러지게 만드는 것이었다. 문득 폴을 연모하는 시몽처럼 연상의 여인을 사랑했던 작곡가 브람스가 떠올랐다. 브람스 음반이 어딨더라? 더듬어봤지만 찾지는 못했다. 한 철 내 바쁘게 쓰인 팔다리가 봄볕에 노곤해졌기 때문이다.

아이는 이내 돌아왔다. 다시 먹이고 돌보는 데 애를 쓸 차례다. 폴, 시몽, 로제. 그런 이름들은 이제 아무래도 좋다는 듯 아이와 부둥대고 마루를 훔치고 냄비를 안칠 것이다. 후다닥 옷을 바꿔입고, 반가운 친구들과 선생님에 대한 아이 이야기를 듣는 사이 무엇도 않겠다던 아침의 다짐들은 전부 잊힐 것이다. 하라는 이도 없고, 하루쯤 건너뛰어도 좋을 자잘한 일들을 오늘도 나는 쓱싹쓱싹하고 말 테지. 어쩌면 그 이유조차 다 알지 못한 채.

‘그건 소설의 세계에서 이리로 건너오려는 몸짓 아닐까? 아이의 지금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여기, 라는 감각에 매끄럽게 스며들기 위해서. 이편과 저편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데 일상의 훈기만큼 좋은 건 없단다.’ 겨우내 튼 뺨을 감싸는 봄의 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밤이 깊어서야 펼쳐둔 책이 떠올랐다. 책이란 사물은 어찌나 유순한지, 하루를 다 보내고도 여전 그 자리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하지만 달콤함은 거기까지. 작가는 불쑥 묻는다. ‘그런데 과연 그녀는 브람스를 좋아하던가?’ 폴은 그제야 주위를 둘러본다. 그녀의 집엔 그녀의 불성실한 연인, 로제가 좋아하는 바그너의 음반만 가득할 뿐이다.

작가는 책 제목에 물음표가 아닌 온점 세 개를 찍어두었다. 그러고 보면 문장 부호 하나가 바뀌었을 뿐인데 본문 속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와 표지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영 다르게 들린다. 오늘의 내가 생활 너머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디를 향해가는지, 그렇게 온점을 달아 스르르 늘어뜨려 보고 되감아 보는 것. 책의 제목은 그러므로 시몽의 목소리로 물어오는 달콤한 질문이 아닌 너무 오랫동안 자신을 방치한 폴의 애달픈 곱씹음인 것이다.

누구에게나 그런 날이 있겠지. 지금 내가 바라보는 것, 꿈꾸는 것, 언젠가 놓쳐버린 것에 대해 어떤 이라도 살갑게 물어줬으면 싶은 날. 도리도 없이 서러운 날. 그런 날 나는 이 책의 제목을 떠올린다. 스스로에 잘 데운 손을 내밀어 건네는 사랑의 인사처럼. 그렇게 질문을 드리우고 또 거두며 삶에는 아직 내가 발견해야 할 나만의 장면이 많다는 사실을 알아간다. 나도 모르던 나의 모습, 그러니까 생각과 마음의 속도를 조금씩 덜어가며 차차 둥글어지는 요즘의 내 모습도 보기에 따라서는 꽤 괜찮을지 몰라. 하는 작은 희망도.

소설을 마저 읽기엔 기진한 밤이다. 무언가 물어주고 답을 기다려주는 이가 있다면 좋을 순간은 다만 이런 때겠지. 아끼고 싶은 밤. 홀로 잠들지 못하는 마음이 부산하다. 탁자 위 낮은 조명이 등대처럼 길을 틔우고 목련이 물 올리는 소리가 들릴 듯 나직한 봄밤. 이런 밤엔 살며시 묻고 싶어지는 것이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나에게 그리고 당신에게. 다정히 건네는 사랑의 인사처럼.

 

 

■ 작가소개

- 스미레(이연진)
『내향 육아』, 『취향 육아』 저자. 자연 육아, 책 육아하는 엄마이자 에세이스트.
아이의 육아법과 간결한 살림살이, 마음을 담아 밥을 짓고 글을 짓는 엄마 에세이로 SNS에서 많은 공감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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