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소에 이야깃거리가 이렇게 많다고?
주소에 이야깃거리가 이렇게 많다고?
  • 연아람(번역가, 『주소 이야기』 역자)
  • 승인 2022.01.19 09: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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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주소 이야기』 리뷰

처음부터 주소를 가지고 책 한 권을 쓰려던 것은 아니었다는 저자의 고백처럼 나 역시도 이 책의 제목만 보았을 때는 ‘주소를 가지고 책 한 권을 쓸 이야깃거리가 이렇게 많다고?’라는 의구심이 먼저 들었다. 그러나 부제를 보자마자 단번에 이해가 되었다. 이 책의 부제는 ‘거리 이름에 담긴 부와 권력, 정체성에 대하여’, 영어 원제는 “What Street Addresses Reveal About Identity, Race, Wealth and Power”다. ‘정체성에 부에 권력에 게다가 인종이라니… 할 이야기가 한 권으로도 벅차겠네.’ 그렇게 읽기 시작한 서문. 미국 뉴욕의 거리 이름에 숨겨진 이야기를 지나 웨스트버지니아, 저자가 거주하는 영국 런던의 거리 이름의 역사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단숨에 읽고 나니 서문 말미에 이런 구절이 등장한다.

“나는 도로명이 정체성과 부에 관한 문제이며. (…) 인종 문제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결국 이 모든 것은 대개 권력에 관한 문제다. 이름을 짓고, 역사를 만들고, 누가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은지, 왜 중요한지를 결정하는 권력 말이다.”(『주소 이야기』 31쪽)

‘결국 주소도 누가 어떻게 얼마나 갖느냐의 문제란 말이지.’

이쯤 되니 떠오르는 말이 있다. “정치는 사회가 지닌 가치의 권위적 배분이다.” 미국 정치학자 데이비드 이스턴의 말이다. 물론 이스턴의 정의가 정치의 유일한 정의도 아니고 개념적 분별력이 약하다는 비판도 있지만 나는 그의 말이 정치의 가장 중요한 본질과 일상성을 가장 잘 꿰뚫는 정의라고 믿는다. 주소처럼 겉보기에 정치와 아무 상관 없어 보이는 것이 정치적 산물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 ‘가치의 배분을 위한 투쟁’만큼 명쾌해 보이는 설명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사용하는 ‘이름’을 짓는 것, 모두가 기억하는 ‘역사’가 되는 것, 누가 어떤 것을 갖고 또 갖지 못하는지를 결정하는 것. 누가 봐도 명백한 ‘가치의 배분’이거늘 왜 주소가, 거리 이름이 정치와 관련된 문제라고 이제껏 생각하지 못했을까.

민음사

저자 디어드라 마스크는 주소와 관련한 정치의 문제를 크게 ‘개발’, ‘기원’, ‘정치’, ‘인종’, ‘계급과 지위’로 구분하여 논의를 진행한다. 그중에서도 인도와 아이티의 이야기를 가장 먼저 배치한 것은 저자의 설명대로 주소가 없는 사람들의 삶이 어떤 모습인지를 설명하기 위함이지만, 주소의 유무가 인간의 기본권을 얼마나 좌우하는지 주소의 정치성을 단박에 보여 주는 적나라한 증거로 작용하기에 충분하다.

마스크의 인도 콜카타 슬럼 방문기는 그동안 주소가 없어 빈민가를 벗어날 기회조차 갖지 못했던 사람들의 삶을 조명한다. 슬럼 주민들은 주소가 없어 은행 계좌도 개설 할 수 없고 사회보장제도의 보호를 받는 데 필수적인 신분증도 만들 수 없다. 주소가 없으면 사회에서 ‘개인’으로 식별되지 않기 때문이다. 주소는 단순히 누군가 나를 찾는 것을 용이하게 하는 수단을 넘어 각종 사회 인프라의 혜택을 누리기 위해 필요한 신원 증명 그 자체다. 그뿐만이 아니다. 한 노숙자가 “내 이름이 찍힌 우편물을 받는 건 누군가에게 인식된다는 뜻”으로 “감사한 마음”이 든다고 고백한 것(14장)을 보면 주소는 인간이 현대 사회에서 존엄성을 갖춘 시민으로 살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요소다.

생과 사를 가르는 공중 보건 위기의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다. 특히 전염병이 창궐하는 시기에 환자를 식별하고 전염병의 진원지를 찾는 일은 위기 상황을 타개하여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결국 주소는 장소가 아니라 사람을 찾는 수단이라는 의미다. 인류를 2년 넘게 괴롭히고 있는 현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우리는 주소의 효용을 실시간으로 목도하는 중이다. 주소는 록다운으로 완전히 고립된 취약 계층을 확인하고 그들에게 생필품과 생존에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필수적이다. 또 특정 지역의 백신 접종률이 얼마나 되는지, 접종률이 낮아 감염에 상대적으로 취약한 지역이 어디인지 파악하여 적절히 대응하는 데도 꼭 필요하다.

주소는 빈곤이나 전염병 퇴치와 같이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에도 영향을 미치지만 그 사회가 무엇을 가치 있게 여기는지, 누가 권력을 갖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강력한 도구가 되기도 한다. 이란 테헤란에 등장한 IRA 보비 샌즈 거리(8장), 거리 이름 개정을 통해 과거사를 청산하는 독일 이야기(9장), 노예제를 옹호한 인물을 기리는 거리 이름을 바꾸려는 이스라엘의 이야기(10장), 흑인 공동체의 상징인 마틴 루서 킹(MLK) 스트리트의 번영을 꿈꾸는 멜빈의 이야기(11장), 정체성을 지키려는 자들과 혁명을 완성하려는 자들의 갈등 이야기(12장)가 모두 그런 사례다. 저자가 지적했듯이 이제 우리 사회는 어떤 주제에 대해 입장을 표명하고 우리가 어떤 공동체인지 결정할 수 있는 기회가 점차 줄고 있다. 거리 이름이 언뜻 분열의 도화선으로 기능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적어도 그런 갈등을 통해 이따금이나마 공동체의 정체성을 논쟁하는 일은 민주주의의 가치를 성찰하는 좋은 기회다.

인도나 아이티에서 주소 없이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첫머리를 연 저자는 노숙자 문제로 본문을 마무리한다. 슬럼가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노숙자가 노숙자의 삶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주소가 필요하다는 점, 노숙자들에게 주소를 만들어 주는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구상한 사람들을 찾아간 이야기를 풀어놓고 마지막으로 주소의 미래를 논의한다. 이미 왓스리워즈나 구글의 플러스 코드와 같은 디지털 주소가 전통적인 형식의 주소를 대신하여 주소가 없는 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주소를 제공하고 있지만, 저자 마스크는 디지털 주소가 궁극적으로 전통적 주소의 대체물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공동체를 더 공동체답게 만드는 논쟁의 여지를 원천적으로 차단한다는 이유도 있지만 이웃의 주소가 상호 연관성을 상실하면서 모든 개인이 지도 위의 점으로 존재하는 세계가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디지털 주소가 주는 비교할 수 없는 편의성에도 불구하고 나 역시 저자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마스크는 책을 이렇게 갈무리한다.

“그러나 18세기 사람들은 (…) 이 땅에 주소를 만드는 일이 정치적 행위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현대인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주소 이야기』 426쪽)

책의 부제와 서문을 통해 역자가 우리 삶에서 구현되는 주소의 정치성과 그 범위에 주목했던 것처럼 저자 마스크도 독자들이 이 지점에 주목하기를 바라는 듯하다. 그 옛날 도로에 이름을 짓고 번호를 붙이며 주소를 만드는 일이 계몽 사업이었듯이 이 책 『주소 이야기』도 일상의 삶에서 만나는 정치를 바라보는 눈을 보다 예민하게 만들어 주는 작은 ‘계몽 사업’이 되기를 바란다.

글 : 연아람(번역가, 『주소 이야기』 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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