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머물다 가는 삶을 위하여
잠시 머물다 가는 삶을 위하여
  • 김혜식
  • 승인 2008.04.10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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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집
▲ 김혜식(수필가)     ©독서신문
 흙을 밟아볼 엄두조차 못내는 아파트 생활이어서인지 그 옛날의 흙집이 불현듯 그립다. 요즘 따라 그 흙집에서 농사를 업(業)으로 삼으며 살아가던 순박한 어느 농사꾼의 일상이 손에 잡힐 듯 아련히 그려짐은 어인일일까.
 
 무더운 여름날 새벽닭이 홰를 치면 흙집 안주인은 머리에 흰 수건을 쓰고 정지에 나가 아침밥을 짓는다. 흙 부뚜막에 걸린 가마솥에 쌀을 안치고 아궁이에 불을 때면 ‘부르르 부르르 ’밥물이 넘치며 밥이 끓는다. 바깥양반은 푹푹 찌는 한낮을 피해 식전 밭일을 할양으로 허리춤에 호미를 꽂고 근처 밭으로 향한다.
 
 고추 밭에 나가 고추 시누대를 세우고, 김을 몇 고랑 매고나면 동녘엔 붉은 태양이 이글거리며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다. 벌써부터 밭고랑에 앉은 남정네의 등줄기엔 빗줄기처럼 땀이 흐르기 시작한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연신 주먹으로 씻으며 밭고랑에 풀 한포기라도 더 뽑으려고 호미질을 멈추지 않는다. 얼마간 밭일을 하던 남정네는 시장기를 느꼈는지 신발에 묻은 흙을 툭툭 털며 흙집을 찾는다.
 
 황토 흙의 봉당에 멍석을 깔고 울타리 콩을 까 넣고 지은 보리밥, 풋고추, 오이냉국, 배추 겉절이의 소박한 밥상을 가운데 두고 흙집 내외는 아침밥을 먹는다. 이때 이웃집 영감님이 담뱃대를 입에 물고 “어험” 헛기침을 하며 흙집을 찾는다.

 “ 박서방 오늘 바쁜가? 우리 담배 밭에 담배 이파리 좀 따주려나?”
 옆집 영감님의 갑작스런 방문에 흙집 내외는 황급히 수저를 밥상 위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영감님께 깍듯이 예를 지킨다.

 “ 영감님 어서 오세요. 진지는 드셨는지요? 저희 논에 오늘 피사리 뽑으려했는데 논에 피사리는 내일 뽑지요. 한술 뜨고 곧장 담배 밭으로 가리다.”

 벼이삭보다 피사리가 더 많은 자신의 논이 걱정되면서도 옆집 영감네 담배 이파리 먼저 따줄 요량으로 박서방은 자신의 논일도 내일로 미룬다. 담배 한 개비를 피워 물며 서둘러 영감네 담배 밭으로 향하는 박서방 발길이 무척이나 가볍다. 영감님을 이웃해 살며 자신의 친부모처럼 의지하지 않았던가. 집안의 대소사며 힘든 농사일도 서로 품앗이하며 지내는 사이가 아니던가.

 박서방은 담배 밭고랑에 따놓은 담배 이파리들을 지게에 얹어 건조실로 나르며 올해 영감님네 담배 농사가 풍작을 이룬 것을 자신의 일처럼 기뻐한다. 새참으로 나온 막걸리 주전자를 단숨에 비운 박서방은 더욱 손에 힘이 주어지는 듯 담배 잎을 따는 그 손놀림이 여느 때보다 재빠르다.

 박서방의 손길에 의해 너울너울 그 푸름을 자랑하던 담배 이파리가 앙상한 대궁만 남기고 얼추 다 따질 무렵이면 온 종일 땅을 달구던 태양도 서서히 서녘으로 기울기 시작한다. 어느새 마을 흙집마다 굴뚝에서 저녁밥을 짓는 듯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지게를 지고 집으로 향하는 박서방은 자신이  한 일이 퍽이나 보람 있게 생각되었다. 허릴 다쳐 밭일을 못하는 옆집 영감님의 일손을 도왔다는 생각에 고단함도 잊은 것이다. 남의 일도 내일처럼 여기며 이웃의 정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는 박서방의 얼굴이 유독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넉넉한 심성을 지닌 농사꾼 박서방이 살던 흙집은 지붕에서 마루 밑 댓돌까지 모난 곳이 없다. 마루, 문틀, 기둥이 언뜻 보긴 각이진 듯 하나 찬찬히 뜯어보면 다른 태를 지니고 있는 게 특징이다. 이즈막  흙집을 떠올릴 때마다 우리가 그곳에 살 땐 그래도 사람답게 살아서 살 맛 나는 세상이 아니었나 싶다.
 
 가난했지만 남에게 모질지 않았고 이웃을 돌아볼 줄 알며 자신의 뱃속을 채우기 위해 남을 짓밟지 않았던 선한 마음들이 숨 쉬던 곳이 아니었던가. 하여 흙집엔 우리들의 어진 심성이 그대로 서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요즘은 어떠한가. 흙집이 자췰 감추고 토담이 무너지고 누구든 쉽사리 밀치고 들어서던 사립문이 사라지자 차디찬 철문이 그 자릴 떡 차지하였다. 인심이 흉흉하여 최첨단 폐쇄회로를 설치하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집집마다 문단속 하느라 여념 없다. 흙의 기운을 막아버린 시멘트 마당엔 풀 한포기 자라지 못하고 있다. 이런 곳에 살다보니 이웃에 누가 사는지조차 모르고 한편 알려고 들지도 않는다. 이웃사촌도 이젠 옛말이 되었다.

 흙집들이 사라지고 회색빛 시멘트 숲에 갇혀 사노라 훈훈한 인간성을 상실한 것이다. 메마른 감성은 극도의 이기심마저 만연시켰다. 만에 하나 이웃 일에 나서기라도 한다면 그땐 여지없이 오지랖 넓은 사람으로 오해 받기 십상인 세태에 살고 있다. 지금이라도 이런 마음을 접고 삭막한 마음자락에 이웃 사랑의 불을 지펴야 하리라.

 이 땅에 우리가 얼마나 머물 것인가. 한껏 살아야 백년, 아니 그 안에 어찌 될지 모르는 게 인생사 아닌가. 잠시 왔다 머물고 가는 삶, 그 무엇을 더 탐하랴. 육신은 한줌의 흙으로 남지만 부끄럼 없는 이름 석 자 만은 후대에 남기고 가야 하지 않는가? 흙집에 살던 그 마음을 이제라도 추슬러 남에게 정을 베풀고 덕을 쌓는 일에 심혈을 기울임이 어떨까?
 
 그 마음을 되찾는 일이야말로 부와 명예를 쌓는 일 못지않게 인생에 뜻 깊은 일이 아닐까? 그런 마음이 자꾸만 나의 가슴 속을 파고드는 것으로 보아 이제 나도 나이를 제대로 먹는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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