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장난은 이제 그만
불장난은 이제 그만
  • 김혜식 수필가/前 청주드림 작은도서관장
  • 승인 2021.11.30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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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식 수필가/前 청주드림 작은도서관장

마음의 성냥갑 실체가 못내 궁금하다. 라우라 에스키벨이 지은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이라는 책에 의하면 사람은 저마다 마음 속에 성냥갑을 준비하고 있단다. 아마 내게도 언제든 불티만 날아들면 금세 발화 될 성냥갑이 몇 갑이나 꼭꼭 숨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야 심연 깊숙이 감춰진 성냥갑에 불씨를 옮기는 원형을 비로소 확인했다. 평소 이것만 대하면 내 마음이 뜨겁게 불타올랐던 것을 예전엔 미처 몰랐던 것이다. 아마도 그동안 이게 피워낸 불꽃의 온도는 마치 용광로 속 같은 화기였지 싶다.

가슴에 불을 지르는 것은 다름 아닌 빨강 색깔이다. 이 색만 보면 괜스레 가슴이 마구 뛰곤 했다. 심지어 핏빛처럼 피어나는 장미꽃만 바라봐도 그랬다. 단순 그 꽃이 아름다워서만은 아니다. 꽃이 안겨주는 붉은 색 이미지 때문이다. 마을 호숫가 둘레 길에 조성된 인공물에 의지한 채 생장하는 장미 넝쿨이다. 해마다 6월쯤이면 장미는 마치 그 일대를 불이라도 지를 기세인양 붉게 피어나 화려한 꽃 터널을 이루곤 한다.

그 터널 속을 눈 감고 팔짱까지 낀 채 유유히 거니노라면 마치 머리 위에 큰 화환을 뒤집어 쓴 듯한 착각에 절로 빠지곤 하였다. 꽃 터널에 갇혀 향긋한 장미의 향기에 심신이 흠뻑 젖는 시간이면 가슴 가득 번지는 꽃이 지닌 붉은색에 나도 모르게 한껏 함몰 하곤 했다. 장미만 대하여도 갑자기 묘한 흥분마저 일 정도이니…. 언제부터 이런 희열감에 사로잡혔었는지 정확한 시기는 모르겠다. 호수 둘레길 인공물 일대에 장미꽃이 피면 이런 감흥에 젖는 게 무한정 행복했다. 이 기분에 이끌려 지난날 그곳으로 꽃 마중을 나가곤 했나보다.

어느 인류학자는 인간이 최초로 의식한 색깔이 빨강색이라고 했던가. 이게 아니어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 또한 색깔 속에 내재 됐다면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일례로 여성용품을 판매하는 사업체 인테리어 중 의자, 소파 등을 보라색으로 치장하면 여인들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는 통계도 있다.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신과 맞지 않는 색깔의 옷을 입으면 건강이 안 좋아진단다. 반면 맞는 색 옷을 입으면 건강해지는 것은 물론, 운도 상승한다는 말을 어느 책에선가 읽은 기억이 있다.

과학적으로 검증된 바는 아니다. 하지만 위에 언급한 말이 사실이라면 색이 인간의 운도 좌지우지 하는 신묘(神妙)함을 지닌 게 틀림없다. 이렇듯 색은 인간의 운명만 주관 하는 게 아닌가보다. 심리에도 적잖이 영향을 미치는 게 분명하다. 나 역시 붉은색만 바라보면 가슴이 요동치니 말이다.

20여년 전 일로 기억한다. 어느 동네 골목에 주차한 많은 차량에 누군가 불을 지르는 사건이 자주 발생 했다. 나중에 범인을 잡고 보니 갱년기 증세를 심하게 앓는 중년의 여인이었다. 여인은 자신이 겪는 심신의 변화로 말미암아 항상 마음이 우울하고 침잠됐다가도 허공에 치솟는 불기둥이나 불꽃을 바라보면 행복한 감정에 사로잡히곤 했단다. 그래 화염에 휩싸이는 물체를 보고 싶어 고의로 골목을 돌아다니며 주차한 차량에 불을 질렀다는 자백이다. 이 여인도 모르긴 몰라도 당시 붉은색에 광적으로 집착한 듯하다.

젊었을 때는 유독 검정색을 선호하였다. 20대 초반부터 40대 중반까지 외출복은 항상 검정색 주류였다. 그땐 유독 맑고 흰 피부 덕분에 검정색 옷을 입으면 우아하고 기품 있어 보인다는 주위의 말을 곧이 들어서다.

그러나 50대에 이르러서부터는 왠지 검정색이 칙칙하고 인상까지 어두워 보인다는 판단 때문이었던가. 검정색 옷을 벗어던지고 밝은 색 옷을 선택하기에 이르렀다. 그중에 가장 마음에 든 색은 붉은색이다. 흔히 이 색 옷은 나이 들어 입으면 자칫 촌스럽거나 아님, 상실한 지난 청춘에 대한 회한 때문이라고 흔히 말한다. 또한 주책이 빚어낸 최후의 발악이라고 혹평까지 한다.

그럼에도 타인 시선 따윈 아랑곳 하지 않고 빨강색 옷을 즐겨 입는다. 이는 이 색을 바라보노라면 가슴에 갑자기 불이 붙는 느낌 때문이다. 또한 심연 깊숙이 똬리를 틀었던 알 수 없는 불안, 우울함이 순식간에 사라지게 하는 효험을 내포하고 있어서다. 뿐만 아니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점차 잃어지는 열정과 삶의 활력을 안겨준다고나 할까. 활화산 같은 뜨거운 불길을 가슴 속에서 치솟게 하는 효능도 지녔잖은가. 이로보아 빨강색은 내 마음 성냥갑 속 개비 마다 활활 불을 지피는 정염의 불씨다.

하지만 불의 속성은 인간에게 이로움만 안겨주는 게 아니잖은가. 인류는 불을 이용하여 문명을 싹틔웠으나 순식간에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드는 황폐함도 지녔다. 그러고 보니 탐욕에 지피는 불씨 역시 위험하긴 매한가지다. 이것을 경계해야 하는 나이다. 젊은 날엔 무모하리만치 무익한 일에 심신을 불사르기도 했다. 진취적이고 도전적인 성향을 애써 갖추려고 안간힘 쓴 게 그것이다.

뒤늦게 철이 드나보다. 이제는 세상사를 순리에 맞게 행하고 싶다. 나이 들어서 집착(執着), 애착(愛着), 탐착(貪着)에 불을 지피는 일이야말로 허황한 불장난이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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