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여, 사회적 약자에게 ‘동정심’을 보태지마라
미디어여, 사회적 약자에게 ‘동정심’을 보태지마라
  • 송석주 기자
  • 승인 2021.11.06 06: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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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태양의 후예’에서 송혜교의 친구 역할로 나온 ‘표지수’라는 캐릭터는 하반신 마비로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이다. 다들 알다시피 ‘태양의 후예’는 장애인 소재 드라마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의 가장 가까운 친구가 장애인이었다. 그는 직업이 의사이고, 쿨한 성격의 소유자이며, 한 가정의 어엿한 어머니였다. 평범한 인간인 것이다. 이 설정을 언급하는 이유는 그간의 미디어에서 장애인은 가난하고 불쌍한 존재로만 그려져 왔기 때문이다. 장애인이 평범한 직장인으로 등장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장애인이 우리 사회의 약자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다고 그들을 시혜적인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은 장애인에 대한 ‘2차 가해’이자 ‘또 다른 폭력’이다. 사회적 약자를 다루는 바람직한 방식은 그들을 가엾게 여기는 게 아니라 그들이 평범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하는 것이다. 하지만 미디어는 장애인을 계속해서 연민의 대상으로 위치시킨다. 그래야 시청자들의 정서를 자극해 시청률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시청률의 덫으로 인해 장애인은 더욱더 변방으로 밀려난다. ‘장애인=불쌍하다’는 위험한 등식은 점점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게 된다.

‘세계 최초의 시각장애인 공인재무분석사’로 불리는 신순규 씨는 <독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영화나 드라마에서 장애인들이 일상적인 공간에 머무르면서 스쳐 지나가는 역할로 많이 등장해야 한다. 이건 내가 미디어 업계 관계자들을 만날 때마다 하는 얘기다. 장애인을 인간 승리의 주제로 거창하게 소비하지 말고, 아주 자연스럽게 일상적인 삶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어야 한다”며 “우연히 들른 은행의 직원이 장애인일 수도 있다. 그런 이미지가 자주 노출되면, 대중들이 장애인을 더욱 자연스럽고 현실적으로 인식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주인공이 자주 가는 빵집 주인이, 주인공의 친한 친구가, 주인공의 직장 동료가 장애인으로 빈번하게 등장해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의 인식이 개선되고, 실제 장애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의 생활공간이 더욱 확장될 수 있다. 장애인이 집밖으로 잘 나오지 않는 이유 중 하나가 사람들의 편견과 차별적 시선임을 생각하면 이러한 미디어의 재현은 적극 권장되어야 한다. 비단 장애인뿐만이 아니다. 성별, 인종, 성 정체성 및 성적지향 등에 따른 차별을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사회적 약자가 인간 승리의 서사 속 ‘특별한 존재’로 다뤄지면 안 된다.

평론가 이승한은 책 『잘 봐 놓고 딴소리』에서 “여성보다는 남성이, 성소수자보다는 비성소수자가, 장애인보단 비장애인이, 흑인보다는 백인이, 어린이와 노인보다는 청년과 중년이, 블루칼라보다는 화이트칼라가, 저학력자보다는 고학력자가 더 많이 ‘주연’으로 등장했다”며 “미디어를 통해 타인에게 이해와 공감을 받는 일에서조차 빈익빈 부익부, 즉 양극화 현상이 나타났다”고 지적한다. 그의 말처럼 실제 세계는 아주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간인데, 미디어는 ‘이성애자’ ‘비장애인’ ‘백인’ ‘고학력’ ‘남성’에게만 주‧조연의 자리를 내어주었다.

나아가 이승한은 “PC 묻었네”라는 표현을 통해 일부 사람들의 미디어 속 소수자 재현에 대한 혐오 인식을 폭로한다. ‘PC’란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의 줄임말로 말과 행동에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편견이 포함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단어다. 이승한은 “PC 묻었네”라는 표현에 대해 “영화나 드라마에서 ‘우리 작품은 다양성을 반영해 만들었다’고 주장하기 위해 사회적 소수자 캐릭터를 ‘토큰’처럼 끼워 넣은 점을 비아냥거리는 표현”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승한은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소수자였던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라며 “소수자의 목소리를 담아내려는 노력을 비웃는 사람들에게 동의하진 않지만, ‘묻었다’는 표현만큼은 절묘하게 맞는 구석이 있다. 아직 충분히 많지 않다. 고작 ‘묻’혀서야 되겠나.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더 높은 해상도로 이해하려면, 묻히는 수준이 아니라 푹 담가야 한다”고 비판한다.

[독서신문 송석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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