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을 표백하다
양심을 표백하다
  • 김혜식 수필가/前 청주드림 작은도서관장
  • 승인 2021.10.29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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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식 수필가/前 청주드림 작은도서관장

방앗간에서 고추를 빻으며 눈물을 주체 못했다. 유독 매운 고추 맛 탓이런가. 잦은 재채기와 함께 눈물이 하염없이 흐른다. 하지만 내 눈물의 근원은 다른데 있다. 지금 방앗간 기계 속에 담긴 고운 빛깔의 고추는 시댁 육촌 동서가 남긴 마지막 선물이다. 방앗간 기계의 굉음과 함께 곱게 갈리고 있는 고춧가루를 바라보자 더욱 슬픔이 북받친다.

아픈 몸을 추스르며 밭에서  빨갛게 익은 고추를 땄을 생전의 동서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어디 이뿐이랴. 햇볕에 고추를 애써 말린 후 그것의 꼭지를 따고 고추 하나하나를 행주로 닦았을 육촌 동서 아닌가. 그리곤 많은 량 고추를 나의 몫으로 남겨 놓고 홀연히 그녀는 이 가을에 이승을 떠났다. 

올 추석에 남편은 고향을 다녀오며 붉은 고추가 담긴 큰 비닐봉지를 들고 왔다. 펼쳐보니 만지기만 해도 바스라질 듯 잘 말린 선홍빛 고추가 그 안에 가득 들어있다. 가루로 빻기 전 먼지를 닦기 위해 흰 행주로 고추를 일일이 닦았다. 하지만 동서가 얼마나 깨끗이 닦아 갈무리를 잘해놨는지 행주에 어떤 이물질도 묻어나지 않았다. 평소 동서의 깔끔하고 야무진 손끝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어디 이뿐이랴. 그녀는 몇 해 전부터 건강을 잃어왔음에도 주변 사람들조차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항상 그곳을 찾아가면 밭에서 일을 하다가도 손에 들린 호미를 내동댕이치고 달려와 우리 두 내외 손을 따뜻이 부여잡지 않았던가. 늘 해맑고 자애로운 웃음을 입가에 잃지 않던 그녀다. 

힘들게 지은 농산물을 자신 자식들 나눠 주기도 바쁠 텐데, 해마다 쌀, 참깨, 고추 등을 한참 손아래인 내게도 잊지 않고 챙겨주곤 했다. 그것을 받을 때마다 동서의 따뜻한 마음에 얼마나 감복했던가. 그날 고추가 가득 든 비닐봉지 속엔 삐뚤빼뚤 힘없는 손으로 씀직한 한 장의 메모가 들어있어 그것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젖었다. ‘ 동서, 올해는 몸이 안 좋아 밭일을 소홀히 했더니 고추농사가 시원찮네. 얼마 안 되지만 햇볕에 말려 맛있을 거네, 건강히 잘 지내길 바라네.’라는 글귀가 전부다. 그 글 속엔 나를 알뜰히 생각하는 마음이 담뿍 들어 있어서 그것을 읽고 난 후 몹시 가슴이 저렸다.

삶을 사는 동안 주위로부터 크고 작은 선물을 무수히 주고받곤 했다. 무엇보다 피와 땀이 녹아있는 선물이야말로 가장 진정성 있는 선물이련만 타인에게 이런 귀한 선물은 많이 받았으나 정작 나는 제대로 준 적이 없는 듯하다. 그중에 피땀 흘려 애써 농사지은 농산물만큼 값진 선물이 어디 있으랴. 하지만 우린 언제부터인가 우리 땅에서 재배되는 농산물이 든 선물 세트나, 곡식 선물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하다. 그야말로 사과 및 배 한 상자, 쌀, 잡곡, 고추 등을 선물로 건네면 시큰둥하기 예사라면 지나칠까. 

몇 해 전 늦가을이었다. 단무지 용 무 잎이 시래기로 제격이라고 하여 근처 지인 밭에서 힘들게 걷어와 농장 그늘진 장소에서 꽤 많이 말렸다. 시래기가 꾸덕꾸덕 말려지자 내 딴엔 그것이 대단한 선물인양, 정성껏 포장까지 해서 지인에게 택배로 보냈다. 그것을 받아든 지인은 여태 보내준 시래기 잘 받았다는 인사 한마디조차 없다. 아마도 내가 선물 선택을 제대로 못한 듯하다. 좀 더 가치 있는 선물을 보낼 것을 하는 후회도 잠깐 한 게 사실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우리 고장 찰옥수수가 전국적으로 유명하여 옥수수 수확 철이 다가오면 생산 농가에 연락하여 한 접씩 지인들에게 보내곤 한다. 비록 가격은 저렴한 농산물이지만 우리 고장의 특산물이라고 자랑할 만큼 찰지고 맛있는 옥수수라 좋은 선물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보낸 것이다. 하지만 겨우 여덟 명 중 두 사람만 옥수수 보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받기도 했다.

하긴 눈을 돌려보면 선물의 의미를 매길만한 값 비싸고 귀한 물질이 산적해 있다. 명품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비싼 한우 갈비를 비롯하여 손으로 일일이 꼽을 수 없으리만치 선물로써 가치를 지닐법한 게 수두룩하다. 그러나 안전한 먹거리만큼 귀한 선물이 어디 있으랴. 그래 우리 땅에서 생산된 농산물이 최고의 선물이란 생각이다.

며칠 전 겪은 일 때문에 이런 생각이 더욱 공고해졌다고나 할까. 동네 마트에서 중국산 깐 도라지를 구입 했다. 그것을 요리하기 위하여 포장을 뜯는 순간 아연실색 했다. 모르긴 몰라도 그것에서 우러난 물질이 깐 도라지 변색을 방지하기 위한 방편의 표백제인 듯하다면 지나친 기우일까? 우윳빛 색의 뿌연 물이 아무리 헹궈도 도라지에서 계속 우러나왔기 때문이다. 그것을 본 후 께름직해 버릴까 하다가 아까워 며칠을 물에 담갔으나 여전히 그 물이 우러나온다.

우리 농산물이라면 이런 눈가림을 했을까 싶다. 중국산 깐 도라지를 보면서 국민 건강을 담보로 먹거리를 갖고 장난치는 일부 상인들이 야속하기 조차했다. 다소 색이 변색 되면 어떠랴. 유해물질이 첨가된 것보다는 낫잖은가. 코로나19로 안 그래도 건강이 위협 당하는 요즈음이다. 국민들이 바이러스와 대적하느라 지친 것을 염두에 둔다면 먹거리를 통하여 양심을 표백해선 안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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