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 명문장] 이상하고 섬뜩한 활기 아래 감춰진 끔찍한 욕망의 역사
[책 속 명문장] 이상하고 섬뜩한 활기 아래 감춰진 끔찍한 욕망의 역사
  • 안지섭 기자
  • 승인 2021.10.05 17: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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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은 몇 개의 문장만으로도 큰 감동을 선사하고 알찬 정보를 제공합니다. ‘책 속 명문장’ 코너는 그러한 문장들을 위해 마련한 공간입니다.

우주복을 입은 엑스트라들이 웅성댔다. 벌써 몇 번째 다시 찍는 것인지 몰랐다. 어느새 깊은 밤이 되어 하늘에는 별이 가득했다.
그들은 쉬는 시간을 틈타 은박지로 만든 것 같은 옷을 벗고 이마의 땀을 닦았다. 그러고는 촬영장 구석에 놓여 있는 생수병의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힘든 작업이었지만 누구 하나 관두고 돌아가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요즘 같은 시절에 이보다 나은 부업은 좀처럼 없었으니까.<16쪽>

여자가 비명을 지름과 동시에 전동 드릴의 날이 노인의 이마를 뚫었다. 피와 뇌수가 분수처럼 솟아올랐다. 노인은 팔다리를 부들부들 떨었지만 그것도 잠시, 곧 축 처지더니 제어기에 몸을 대충 걸친 형상이 되었다가 툭 떨어졌다. 주변 벤치에 있던 사람들이 일어섰다. 카페 주인이 밖으로 뛰어나가는 걸 여자는 멍하니 보고 있었다. 그 모든 것들이 슬로모션처럼 느릿느릿 전개됐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것도 그 순간이었다. 어떻게 지구가 이렇게 빨리 회전할 수 있지? 잠시 휘청거리던 여자는 테이블 모서리를 붙들고 겨우 일어나 벽을 짚으며 카페 출입구 쪽으로 걸어갔다.<34쪽>

주민들은 마치 화성인이 된 것처럼 행동했다. 그들은 화성을 꿈꿨고 화성을 상상했으며 극관, 대운하, 먼지폭풍 같은 단어들에 대해 공부했다. 마을 초입 식당 간판에는 별, 달, 태양계의 그림이 들어갔고, 타오르는 듯한 주황빛의 화성 사진을 곁들이지 않은 가게는 눈길조차 끌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영화 세트장이 조성된 공터 쪽으로 빠지는 교차로 한구석에 비스듬히 걸려 있는 검은색 현수막과 빛바랜 피켓을 눈여겨본 이가 단 한 사람도 없었던 것은. 한껏 들뜬 마을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검고 음울한 플래카드에는 다음과 같은 구호가 흰색 페인트로 삐뚤삐뚤 적혀 있었다.
“화성은 물러가라. 여기는 지구다.”<75쪽>

그의 눈꺼풀이 떨리기 시작한다. 깊고 어두운 굴. 그 내부의 끝을 알 수 없는 어둠. 아버지는 어린 그의 손을 잡고 그 깊고 깊은 터널 속을 내려가고 또 내려갔다. 발밑에 아무것도 없는 듯 오직 낙하만이 계속될 때, 그가 무서워 울면 아버지는 소리치곤 했지.
-정신차려. 이게 너의 왕국이니까. 아니지. 이건 너의 왕국이 아니라 나의 왕국이야. 이제 곧 너는 나고 나는 네가 될 것이며 우린 그렇게 영원히 함께하게 될 테니까.<81쪽>

[정리=안지섭 기자]

『무언가 위험한 것이 온다』
김희선 지음 | 민음사 펴냄 | 296쪽 | 1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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