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을까?
노동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을까?
  • 배세진 프랑스 철학 연구자
  • 승인 2021.09.07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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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쉿 잡: 왜 무의미한 일자리가 계속 유지되는가?』에서 전개되는 불쉿 직업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

안타깝게도 2020년 타계한, 따로 소개가 필요하지 않을 만큼 세계적으로 매우 유명한 좌파 아나키스트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David Graeber, 1961~2020)의 저작 『불쉿 잡: 왜 무의미한 일자리가 계속 유지되는가?』가 드디어 한국어로 번역되었다. 이 저서는 그의 독특한 아나키즘 인류학 사상의 이론적 토대를 구성하는 두 저작 『부채, 첫 5000년의 역사』(정명진 옮김, 부글북스, 2021)와 『가치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서정은 옮김, 그린비, 2009)의 성과가 자신의 논의 배경으로 적절하게 녹아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이론적 틀 안에서 현실의 가장 뜨거운 문제, 미셸 푸코라면 철학의 대상으로서의 ‘현실태’라 불렀을 문제인 ‘불쉿 잡’(불쉿 직업 혹은 불쉿 노동)을 깊이 있게 성찰하면서 현재의 정세에 정치적으로 적극 개입하는 탁월한 작업이다. 또한 동시에 이러한 현실에 대한 성찰이 기존의 이론적 틀을 역으로 검증하고 잠재적으로는 수정까지 한다는 점이 인류학자로서의 비판이론가 그레이버의 독특성을 구성한다.

이 저서에서 그레이버는 인류학 연구자로서 자신이 마주한 '불쉿 직업이라는 현상'과 씨름한다. 앞서 언급한 두 권의 이론적 저서에 기반하면서도 불쉿 직업을 가지고 고통스럽고 불행하고 우울하게 그리고 자괴감 속에서 살아가는 여러 일상행위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그리고 몇몇 경제학적 통계 자료들과 풍부한 역사학적 지식들 그리고 여러 시대 문필가들의 글들을 활용하면서, 불쉿 직업에 대한 다차원적인 분석을 성공적으로 수행한다. 이러한 분석에 기반해 그레이버는 책의 마지막 장인 7장 「불쉿 직업의 정치적 영향: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에서 아나키스트로서의 자신의 대안 즉 '보편적 기본소득'이라는 구체적인 정치적 대안을 제출한다. 하지만 이 장에서 그레이버 스스로가 강조하듯 이 저작은 해답에 관한 책이 전혀 아닌 '문제에 관한 책'이기에, 독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러한 정치적 대안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이 불쉿 직업이라는 현상에 다차원적으로 접근하고 이를 생산한 구조를 이해하는 것 그 자체에 있다.

나는 그레이버의 정치적 대안인 보편적 기본소득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전개하는 다음과 같은 탁월한 분석과 서술의 방식이 현대사회를 특히 그 경제 시스템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매우 유용하며 계발적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그레이버가 본서에서 비판하는 마르크스주의적인 방식으로 노동을 이해하고 있는 나에게도 이 저서에 대한 독해는 그의 분석과 서술의 방식에서 정말 많은 영감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 대해 한 번 더 질문해볼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동의하지 않는 이에게까지도 무언가를 배울 수 있게 강제하는 것, 그것이 일반 독자에게는 양서의, 전문 연구자에게는 ‘잘된 연구’의 기준이다.

그레이버는 1장 「불쉿 직업이란 무엇인가?」에서 여러 사례연구로부터 '불쉿 직업'의 정의, 즉 "불쉿 직업이란 유급 고용직으로 그 업무가 너무나 철저하게 무의미하고 불필요하고 해로워서, 그 직업의 종사자조차도 그것이 존재해야 할 정당한 이유를 찾지 못하는 직업 형태다. 그가 고용되려면 그 직업의 존재가 전제 조건인데도 말이다. 종사자는 그런 직업이 아닌 척해야 한다는 의무를 느낀다"라는 정의를 도출해 낸다. 2장 「불쉿 직업의 종류」에서 불쉿 직업의 다섯 가지 유형, 즉 '제복 입은 하인', '깡패', '임시 땜질꾼', '형식적 서류 작성 직원', '작업반장'을 규정한다. 이러한 예비적 논의 이후 저자는 3장 「불쉿 직업을 가진 이들은 왜 걸핏하면 불행하다고 말할까?」에서 주류 경제학의 이론적 토대(나는 이를 주류경제학이 전제하는 ‘철학적 인간학’이라 부르고 싶은데)인 “인간 본성 이론의 기초”, 즉 '호모 이코노미쿠스' 혹은 '경제적 인간'이라는 근본 가정이 틀렸음을 역시 여러 사례연구를 통해 밝혀낸다. 주류경제학의 인간 본성에 관한 근본 가정과 충돌하게도, 인간은 불쉿 직업 속에서 "걸핏하면 불행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그레이버에 따르면 이러한 충돌은 주류경제학의 인간에 대한 이러한 가정이 애초부터 잘못되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4장 「불쉿 직업에 종사하면 어떤 기분일까?」에서 저자는 일종의 감정사회학적 작업과 같이 불쉿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기분' 즉 감정을 역시 여러 사례연구를 통해 분석한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들을 전제하면서 저자는 이 저서의 핵심이자 백미라고 할 수 있는 5장 「불쉿 직업의 수가 늘어나고 있다」와 6장 「우리는 왜 무의미한 고용이 늘어나는 것에 반대하지 않는가?」에서 굉장히 이론적인 논의, 즉 '구조적 힘'에 대한 논의를 전개한다.

4장까지 저자가 여러 사례연구를 통해 “불쉿 직업이라는 현상”을 확인하는 차원에 머물렀다면, 5장에서 저자는 그렇다면 왜 이러한, 즉 경제학적 합리성에 반하는 불쉿 직업이 증가하고 있는지를 분석한다. 저자는 불쉿 직업의 증가 원인이 통상적인 관념과는 달리 동시대 경제가 서비스업 중심으로 변모한 데에 있는 것이 아니며 서비스업의 비중이 실제로 증가하지도 않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저자에 따르면 오히려 그 원인은 금융산업의 팽창(특히 FIRE 부문, 즉 금융, 보험, 부동산)과 그로 인한 중간 관리자의 증식, 결국 '경영 봉건제'의 확립에 있다. 이에 따라 경제가 (저자가 비판하는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 간의 마르크스주의적 구분을 굳이 활용하자면) 생산적 노동이 아닌 비생산적 노동을 중심으로 짜이면서, 자본주의에 반하는 방식의 '지대 추출 시스템'으로 변해버린다.

6장에서 저자는 앞서 언급한 자신의 이론적 토대를 구성하는 두 저서에서 전개된 논의들을 체계적으로 전제하면서 주류경제학의(그리고 비주류경제학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의) '가치이론'을 비판하고, ‘진짜’ 인간 본성, 그러니까 인류학자가 직접 인간들(일상행위자들)을 만나 경험연구를 진행함으로써 이끌어낸 인간 본성에 기반한 가치이론을 가공한다. 저자는 주류경제학이든 비주류경제학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든 일과 직업을 생산의 관점에서 바라봄으로써, '돌봄노동'이 일과 직업에서 엄청난 비중을 차지한다는 사실, 생산에만 관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는 일과 직업에도 언제나 소비의 측면 즉 '돌봄의 측면'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점을 강하게 비판한다. 그리고 7장에서 이러한 ‘진짜’ 인간 본성을 고려한 정치적 대안은 무엇일지를 궁리한다.

이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인간의 영혼을 파괴하는 이러한 경제 시스템이 형성된 것이 정치적 이유 때문이라고 보기 때문에 그에게는 그 해법 또한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보아 이러한 정치적 해법은 그것이 인간 본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면 절대로 실현될 수 없다. 즉 이러한 인류학적 차원, 그러니까 철학적 인간학이라 할 수 있는 차원을 고려하지 않으면 새로운 경제 시스템의 구축이라는 정치는 또다시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레이버가 주류경제학과 비주류경제학 둘 모두보다 한 발 더 앞으로 나아가는 지점이 있다면, 이는 바로 그가 이러한 새로운 철학적 인간학을 구축한다는 점이다. 그는 결국 주류의 것이든 비주류의 것이든 경제학 그 자체의 경계를 넘어 인류학으로까지 나아감으로써 이 새로운 철학적 인간학 위에서 마르크스가 수행했던 바와 상호 공명할 수 있는 일종의 ‘경제학 비판’을 수행한다. 저자의 이러한 인간학적 기획, 경제학 비판의 기획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 독자라면, 그 이론적 토대를 구성하는 앞서 언급한 두 저서로 거슬러 올라가는 모험을 해 볼 만하다.

이 책의 탁월함은 일상행위자와의 만남을 통해 수행한 광범위한 경험연구에서부터 출발해, 다양한 인류학적이고 역사학적인 지식에서부터 경제학적 통계자료에까지 이르는 놀라운 박학다식에 기반하면서 탄탄하게 자신의 논증을 밀어붙이고 그 대안까지 제시하는 물 흐르듯 시원하게 이어지는 그 구성과 구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인류학의 기법들을 가지고서 원시 부족을 관찰하듯 동시대의 일상행위자를 관찰하고 분석해 내놓은 현대인에 대한 인류학적 기술지라는 점에서도, 또한 아나키즘이라는 이념에 입각한 현 정세 분석을 통해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현실의 운동'으로서의 보편적 기본소득 운동에 기여하는 정치적 팸플릿이라는 점에서도, 이 저서에는 하나의 '가치'를 넘어서는 '가치들'이 있다.

눈 밝은 독자라면 아쉽게도 짧은 지면으로 인해 일일이 다 지적하지 못하는 이 저서의 다음과 같은 참신하고 도발적인 테제들을 반드시 발견하게 될 것이다. 관료제, 금융자본주의, 기계화(로봇화) 등에 대한 굉장히 새로운 방식의 이해와 비판이 있다. 이런 새로운 방식의 이해와 비판이 가능한 이유를 서평자는 그가 인류학적 지식들을 광범위하게 동원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또한 생산주의가 아니라 소비주의의 관점 결국 ‘돌봄노동’이라는 관점을 채택했다는 점이다. 비록 나는 이에 동의하지 않지만, 마르크스주의의 노동가치이론이 실비아 페데리치가 지적하듯 ‘집안의 노동자들’의 가사노동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페미니즘의 비판과 심원하게 공명하는 관점이기도 하다. 우파 포퓰리즘과 좌파 엘리트주의 사이의 이데올로기적 차이에 대한 불쉿 노동이라는 물질적 관점에 입각한 해명, 주류경제학과 비주류경제학 모두와 달리 이론이나 근본 가정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인류학자가 원시 부족을 관찰하듯 일상행위자를 관찰하고 그와 대화함으로써 이론을 구축해 나가는 지극히 사회과학적인 방식의 유효성에 대한 강조도 있다. 노동자들의 감정, 결국 그들이 입은 상처에 대한 분석 등도 강렬하다. 이 통찰력 있는 테제들에서 여러 사회과학적 의미를 이끌어내는 것은 이제 독자의 몫이다.

이 책은 그레이버 사상의 이론적 토대를 잘 알고 있는 전문 연구자들에게도 그 주제의 현재성 혹은 참신함과 논증의 탄탄함 그리고 저작의 구성과 구조로 인해 가치 있을 것이다. 그레이버 사상을 이제 막 접하고자 하는 일반 독자들에게도 혁신적이고 영감이 가득한 논의들과 저자의 박학다식으로 인해 많은 것을 뽑아내며 즐겁게 읽어 내려갈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저널리즘과 학술장의 경계에서 어느 한편에서의 부족함도 지니고 있지 않은 이 탁월한 저서를 강력하게 권한다.

저자의 정치적 대안에 동의하든 그렇지 않든, 부인할 수 없는 이 '불쉿 직업이라는 현상'에 문제를 강하게 느끼면서 '세계를 변혁'하고자 하는 이라면 이 책을 읽어야 한다. 불쉿 직업을 하며 자괴감에 빠져있는 이든 불쉿 직업을 견디지 못하고 실업자가 된 이든 저임금으로 고통받으며 돌봄노동을 하고 있는 이든, 노동자로 분류조차 되지 않는 집안의 가사노동자든, 모두 이 책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 책을 읽고 이 여러 종류의 ‘모든’ 노동자들이 지금의 현상과 그 구조적 원인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가지고 여러 정치적 대안들을 논의할 수 있다면, 그레이버의 말대로 이러저러한 엘리트 정책입안자들이 아니라 이 평범한 노동자들이 정치에 대해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게 된다면, 이 저작의 목표, 즉 그레이버가 마지막까지 쉼 없이 달리며 노력한 아나키즘적 대중 ‘선동’은 성공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노동자들로 인해 노동은 저자가 분석하는 중세와 근대와 현대의 여러 문필가들의 소원대로 결국 구원받을 수 있지 않을까?

글 : 배세진 프랑스 철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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