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뜩하다’ ‘독기가 느껴진다’ 대선을 앞두고 후보 간에 오가는 공방을 보면 절로 이런 생각이 든다. 장혜영 정의당 의원은 최근 “아프가니스탄 난민을 받아들이자”는 말 한마디로 온갖 언어폭력과 인격모독을 당하고 있다. 인터넷 댓글을 보면 가혹과 잔인 사이를 오간다. 내 편이 아니면 무조건 적이라는 투다. 서늘함을 넘어 무섭다.
물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 늘 아름답고 화목할 수는 없다. 숱한 갈등과 충돌이 빚어진다. 얽히고 설키다보면 미움이 싹트고 서로를 혐오한다. 생각과 이익이 다른 상황에서 갈등은 피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정도가 너무 심하다. 우리 사회는 현재 빈부, 이념, 세대를 넘어 젠더, 지역까지 말 그대로 ‘갈등 공화국’의 상황을 그대로 노정하고 있다. 전경련이 최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의 갈등지수(2016년 기준)를 산출한 결과 한국은 55.1로 30개국 중 3위였다. 우리보다 상위에 있는 국가는 멕시코(69.0), 이스라엘(56.5) 정도이다. 분야별로는 사회 2위, 경제 3위, 정치 4위였다. 누구나 통합과 포용을 외치지만 결과는 참담하다.
더 큰 문제는 한국의 갈등 관리 역량이 바닥권이라는 점이다. 한국의 갈등관리지수는 36.2로 전체 30개국중 27위이다. 갈등관리지수는 정부 효율성, 규제의 질, 정부 소비지출 비중 등을 조사해 산출했다.
갈등관리지수가 낮다는 것은 사회가 앞으로 나아갈 기초역량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보자. 요즘 한국사회를 상징하는 단어는 금수저와 흙수저이다. 개인의 능력과 재능이 아무리 뛰어난 들 결코 금수저를 뛰어넘을 수 없다는 절망감이 넓게 퍼져있다. 솔선수범이 필요한 부자는 뒷짐 지고 있고, 사회의 안전장치는 부족하기 짝이 없다.
노동가와 자본가는 함께 해야 할 대상임에도 여전히 착취자와 피착취자로만 인식된다. 젠더 갈등은 또 어떤가. 보이지 않는 장벽에 양성평등은 여전히 갈 길이 멀다. 차별은 바로잡고 차이는 이해해야 하지만 말의 성찬에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삼성경제연구소 조사에 따르면 사회적 갈등에 따른 경제적 비용은 연간 246조원에 이른다. 8년 전 조사이니 지금 시점으로 다시 계산하면 최소 500조원 이상은 될 것이다. 이는 한국의 1년 예산에 해당한다.
따져보면 갈등의 핵심은 경제적 측면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 이를 감안하면 경제적 격차를 줄이기 위한 범 사회적 노력은 절대 필요하다. 지역 갈등 역시 서울에 편중된 경제력과 이로 인한 지방의 소외감에서 비롯된다. 최근 첨예해진 세대 간 갈등 역시 한정된 자원에 기인한 측면이 크다. 청년들의 일자리나 주거문제를 해결하는 게 중요하다는 얘기이다. 이념 갈등 역시 극단적인 좌우간의 목소리가 너무 큰 탓에 일반의 목소리는 잠겨있다.
물론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정치권을 비롯해 학계에서는 그동안 갈등 관리 시스템을 만들고 미래 갈등현안에 선제 대응하자며 여러 차례 논의를 했지만 결과는 늘 빈손이었다. 갈등은 무리와 개인을 해체시키고 파괴한다. 정치꾼은 선거를 생각하지만 정치가는 후세대를 생각한다는 말도 있다. 선거를 앞둔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수없이 되풀이된 ‘화합’과 ‘통합’은 어디에 갔는가.
갈등의 시작은 욕망이나 욕구이다. 그 뿌리는 이기심과 시기심이다. 알려진 대로 갈등은 ‘칡나무와 등나무’의 조합이다. 줄기가 서로 얽혀 자라면서 뒤엉켜있는 모습이지만 사람이 만들어낸 것일 뿐 정작 칡나무와 등나무는 갈등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