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취향이 제각각이듯 출판사도 각기 다른 특성을 지닙니다. 실용의 가치를 바탕으로 독자의 삶에 편의를 제공하는가하면 문학을 통해 인간의 삶을 깊이 탐구하기도 합니다. 또 페미니즘의 기치 아래 성평등을 도모하기도 합니다. 출판사의 다채로운 이모저모. 그 매력을 집중탐구합니다. |
-사회과학 서적에서 교육, 인권, 소외계층 서적으로 확대
-마당을 나온 암탉, 논리야 시리즈 초 베스트셀러
-동네서점 경영난 안타까워, 완전 도서정가제 필요
-책에 담을 메시지, 독자의 손에 건네지는 과정 늘 고민
[독서신문 안지섭 기자] “내려다보는 시선이 미안한데…” 경기도 파주시 출판단지 내의 사계절출판사 사무실 계단에서 사진을 찍던 중 강맑실(65) 대표가 희미하게 말했다. 계단 위쪽에 선 채 아래를 내려다보는 모습이 주는 당황스러움이다. 공감과 배려를 출판 정신으로 해온 그에게 권위와 위계 의식은 낯선 단어였다.
그의 이런 모습은 얘기를 나누다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출판사 설립 5년 뒤부터 합류해 출판 밥만 벌써 34년, 대표로도 27년째 해오고 있지만 여전히 동료나 후배로부터 많은 것을 배운다고 말한다. ‘출판계의 대모’란 표현에는 손사래를 친다. 요즘 유행하는 ‘○린이’ ‘잼민이’ 등 아동 표현 논란에 대해서도 울화통이 터진다. 그는 “어린이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인격체이며, 어린이들이 행동할 때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걸 부족하다거나 능력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온전히 어른들의 그릇된 시각”이라고 꼬집는다.
강 대표는 최근 유년 시절 얘기를 담은 『막내의 뜰』이라는 책으로 사계절출판사의 저자 목록에 이름을 남겼다. 왜 유년 시절에 관한 기억이었을까. 그는 “우리 모두의 유년은 지금 살고 있는 이곳에서 발견되어야 하는 반짝임으로 가득한 시절”이라고 말한다. 그러고는 “집이 한낱 부동산이 아니라 가족 모두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공간이어야 한다면 그 집의 형태나 구조, 그리고 동네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또한 가족은 어떠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하는 계기를 주고자 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사계절출판사의 책들은 당위성의 언어로 누군가를 설득하기보다는 아기자기한 그림책 등으로 공감과 감동을 자아내는 것들이 많다. 딱딱하거나 예민한 이야기를 재치있게 풀어내기도 한다.
사계절출판사가 처음부터 아동‧청소년 서적을 출판한 것은 아니었다. 독재 정치로 사회가 질식하던 시절에 문을 연 출판사들이 그렇듯 사회과학 분야 관련 책을 내놨다. 하지만 민주화가 진행되고 옛 소련이 붕괴하던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분위기는 달라졌다. 설립자이자 강 대표의 남편인 김영종 전 대표가 사회과학 서적에서 ‘교육’ 쪽으로 눈을 돌려 아동과 청소년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물론 어린이들의 눈을 사로잡는 그림책이라고 해서 모두 출간되는 건 아니었다. 책의 메시지가 사계절출판사가 추구하는 가치와 맞닿아야 했다. “하다못해 그림책 한 권에도 작가나 화가의 가치관이 숨어있어요. 하얀 도화지 같은 아이들이 문제 있는 책을 읽게 되면 그게 옳은 걸로 생각하게 돼요.”
1995년 국내 출판사로서는 처음으로 전집류가 아닌 단행본으로 그림책을 펴냈다. 청소년 소설이라는 분야를 개척한 것도 사계절출판사가 처음이다. 사계절출판사가 시작하니 다른 출판사들이 너도나도 청소년 소설 시장 분야에 뛰어들었다.
『누가 내 머리에 똥 쌌어』 『논리야 시리즈』 『마당을 나온 암탉』 등은 사계절출판사가 자랑하는 책 목록이다. 황선미 작가의 『마당을 나온 암탉』은 애니메이션 영화로도 제작됐다. 220만 관객을 동원하며 스페인 시체스 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가족영화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기도 했다. 『반갑다 논리야』 『논리야, 놀자』 『고맙다, 논리야』 등 3부작으로 구성된 ‘논리 시리즈’도 독자의 눈길을 잡았다. 대학입시에서 논술 고사가 도입되는 등 시대 변화의 바람을 탔다.
『누가 내 머리에 똥 쌌어?』와 ‘논리야 시리즈’에는 제목을 둘러싼 비화가 있다. 원제는 ‘자기 머리에 누가 똥을 쌌는지 알고 싶은 작은 두더지 이야기’. 하지만 책에 ‘누가 내 머리에 똥 쌌어?’라는 말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면서 제목을 바꿨다. ‘논리야 시리즈’ 제목 채택과정에서는 논리의 격을 세워야 한다는 편집자들과 독자들에게 친근한 인상을 주어야 한다는 강 대표가 부딪혔지만 강 대표의 뚝심대로 밀고나갔다. 책 제목이 불러일으킨 효과는 성공적이었다.
당시 고비용과 오랜 작업 기간으로 출판계에서 기대 반 걱정 반이었던 프로젝트 『한국생활사박물관』 시리즈는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참신한 역사서로 사랑받고 있고, 남쪽의 출판권자와 북쪽의 저작권자가 직접 만나 계약을 진행한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은 사계절출판사의 상징과도 같은 책이다. 사계절출판사는 1996년부터 홍명희문학제를 통해 벽초 선생과 『임꺽정』으로 남과 북의 평화와 상생의 노둣돌을 놓는 노력을 하고 있다.
인문분야 역시 사계절출판사의 상징이다. 주로 사회 소외 계층을 주목한 도서들이다. 지난해 말 『어린이라는 세계』(김소영)와 올해 초 『사이보그가 되다』(김초엽, 김원영)를 비롯해 올 들어서는 『소년을 읽다』(서현숙), 여성 참정권 운동가 세 명의 인생을 다룬 『여자들의 테러』(브래디 미카코)를 내놨다. 그는 “오래전부터 소수자에 집중해왔다”며 “일관된 가치관이 사계절출판사의 브랜드 가치를 높여준다”고 말했다.
내년이면 창립 40주년. 강 대표는 오늘의 사계절출판사를 만든 이들로 저자와 독자는 물론 서점과 제작처, 물류서고 등 출판사 외 관계자들을 꼽았다. 최근 동네 서점의 경영난에 대해서는 걱정이 많다. “큰 서점은 동맥과 정맥에 비유할 수 있고, 작은 서점은 실핏줄에 비유할 수 있어요. 한 군데가 찔리면 실핏줄 터진 곳이 아프지, 어디 동맥과 정맥이 터질 일이 있을까요?”
출판 생태계를 위해서는 도서정가제의 완전실현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현재 정가의 10% 할인 조항 때문에 출판사들이 ‘굿즈’ 경쟁에 매몰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구간 할인 등 완전한 도서정가제 실현은 어렵지 않겠느냐는 우려에도 출판 생태계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완전한 도서정가제’ 밖에는 없다고 말한다.
평생을 책과 함께 한 그에게 책은 무엇일까. “문화 콘텐츠로서의 책의 역할은 영원할 겁니다. 시대가 바뀔 때마다 책의 메시지를 어떻게 채워나갈지 늘 고민해요, 책을 독자들에게 어떻게 알려나갈지에 대해서도 늘 생각합니다. 책을 만드는 것과 똑같이 중요한 것은 책을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일이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