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위해서는 불속에도 뛰어들겠다” 아이헨도르프의 『어느 건달의 방랑기』
“사랑을 위해서는 불속에도 뛰어들겠다” 아이헨도르프의 『어느 건달의 방랑기』
  • 황현탁
  • 승인 2021.04.30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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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탁의 책으로 떠나는 여행 ⑨]
[책으로 떠나는 여행] <독서신문>은 여행과 관광이 여의치 않은 코로나 시대에, 고전이나 여행기에서 기술된 풍광과 문화를 소개하는 ‘책으로 떠나는 여행’이란 칼럼을 연재합니다. 칼럼은 『세상을 걷고 추억을 쓰다』라는 여행기의 저자이며, 파키스탄, 미국, 일본, 영국에서 문화담당 외교관으로 근무한 황현탁씨가 맡습니다.

⑧ “기모노를 벗어던지고 칼을 들이밀며” - 카잔차키스 『일본중국기행』
⑦ “고종은 진보적이지만 나약하고, 민비는 지적이지만 후계 두려워해”
⑥ “조선 관리들, 중국 사대주의뿐 바깥 물정에는 관심 없어”
⑤ “사람을 파는 죄와 죽이는 죄는 다르지 않다” [황현탁의 책으로 떠나는여행-혜초의 『왕오천축국전』]
④ 운명에는 겸손, 삶은 치열하게-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황현탁의 책으로 읽는 여행]
③ 속좁기로는 1등인 그리스 신들-호메로스의 『일리아스』 
② 존 번연의 ‘꿈’속의 천국 여행 『천로역정』 
①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숫자 12가 의미하는 것은 

독일 낭만주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요셉 아이헨도르프(1788~1857)의 소설 『Aus dem Leben eines Taugenichts』(1826년 발표)는 국내에서 『방랑아 이야기』(문학과지성사, 2001), 『어느 건달의 방랑기』(황금알, 2008)라는 제목으로 출판됐다. 일각에서는 『무용지물의 삶』『어느 건달의 일생』『어느 무위도식자의 삶에서』라는 제목으로 인용되기도 한다.

물레방아로 기계를 돌리는 일터(어떤 일을 하는지는 명시되지 않았지만 어느 글을 보니 밀가루 빻는 공장으로 묘사됨)에 늦게 나온 아들을 보고 아버지는 “이 건달놈아 (타우게니히트,Taugenichts), 너는 또 빈둥거리면서 모든 일을 애비에게 맡기는구나. 더 이상 너를 집에서 먹여 살릴 수 없다. 이제 봄이 왔으니 집을 나가 네 밥벌이를 찾아봐라”고 말한다. 아들은 “제가 건달이라고요. 좋습니다. 집을 나가 저의 행복을 찾아보겠습니다”라며 아버지가 준 여비와 바이올린을 챙겨 여행길을 떠난다.

운좋게 귀부인들이 탄 마차를 얻어 탄 그는 비엔나에 도착한다. 성(城) 같은 저택의 시녀로부터 정원사 일을 제의받고 일을 시작한다. 어느 일요일 성주인 백작부인과 수양딸인 ‘아름다운 여인’의 뱃놀이를 도와주면서 신세를 한탄하며 ‘아름다운 여인’이란 노래를 부른다. 성주는 품행이 훌륭하고 재주가 비상한 “그를 공석인 세관원 자리에 앉힌다. 그는 열심히 일한다. 꽃을 가꾸고 꽃다발을 만들어 성안의 정자 돌 탁자에 놓아둔다. 어느 날 사냥에서 돌아온 ‘아름다운 여인’이 자신이 가져다 놓은 꽃을 꽂고 있음을 확인한 뒤 “이 꽃다발도 받아주세요. 내 꽃밭의 모든 꽃은 물론 그대를 위해서라면 불 속에라도 뛰어들 수 있어요”라며 사랑을 고백한다.

그날 이후 마음이 뒤숭숭해지며 다시 여행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시녀가 싱싱한 꽃을 따서 장원으로 오면 백작부인이 꽃을 달고 무도회에 참석할 것이라는 뜻을 전한다. 꽃바구니를 들고 약속장소로 가 나무에 올라 집안을 들여다보던 중 시녀와 같이 온 사람이 그녀의 숙모였음을 알고 낙담한다. 파티가 끝난 뒤 바구니를 던져버리고 이탈리아 여행을 떠난다.

성의 문지기는 “이탈리아는 모든 일을 하나님이 돌봐주고, 드러누워 일광욕하더라도 저절로 건포도가 자라서 입안으로 들어오며, 독거미에 물리면 춤을 배워보지 않은 사람도 유연하게 춤을 춘다”고 얘기해 준다. 발길 닿는 대로 걸으면서 때로는 숲속에서 좋아하는 노래를 바이올린으로 연주하기도 한다. 어느 객주에서는 연주 대가로 포도주를 대접받기도 한다. 그곳에서 연주하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얘기를 하는 아가씨를 만나고, 성 문지기가 ‘기회가 생기면 놓치지 말라’는 충고도 듣지만 망설인다.

멀리서 말을 타고 온 두 명이 다짜고짜 그에게 길을 안내하라고 하여 말을 따른다. 둘은 화가로 이탈리아로 가던 길이었다. 함께 지내던 중 그들은 “세관원님을 위하여”라는 메모와 함께 상당한 현금을 남겨놓고 사라진다.(나중에 밝혀지지만, 그들은 그를 찾으러 나선 백작 부인이 보낸 사람들이었다) 그는 그 돈으로 혼자 우편 마차를 이용해 이탈리아로 향한다,

그렇게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사람들과 풍물을 알게 되고 짧은 이탈리아어도 이해하고 습득한다. 어느 날 우편 마부와 함께 고성(古城)을 찾는다. 정원으로 나가 바이올린을 연주하니 골짜기에 울려 퍼진다. 고성은 돈 많은 백작의 소유였다. 그는 한적한 성에서 마법에 걸린 왕자처럼 살았다. 건포도가 저절로 입으로 굴러들어온다는 성 문지기 얘기가 허튼소리가 아니었다.

고성의 노파가 전해주는 편지를 열어보니 ‘아름다운 여자’에게서 “모든 일이 잘 해결되었다. 서둘러 오세요. 당신이 떠난 후 더 이상 사는 재미가 없어요.”라는 글이 쓰여있었다. 정원에 저녁을 준비하도록 한 후 “나도 저 새들처럼 계속해서 멀리 여행을 떠나야 할 것 같다”며 고성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를 한다. 성을 빠져나오니 그곳에는 그를 도와 안내할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로마로 들어가 노랫소리가 들리는 정원 앞에 멈춘다. 자신도 ‘아름다운 여인의 노래’를 연주한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주저하고 있을 때 독일어 말소리가 들려 그곳으로 가니, 독일인이 ‘세상 구경 후 그림으로 옮기려 한다’고 답한다. 그 독일인 집으로 가 우편 역마를 함께 이용한 화가 얘기를 하자, 그는 백작부인이 와서 두 화가와 젊은 악사를 찾아다녔다는 얘기를 들려준다. 바로 악사인 그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 날 노래 소리가 들렸던 정원으로 가나 그녀를 찾을 수 없었다. 비엔나 성을 떠난 후 묵은 객주 집에서 포도주를 주었던 시녀가 몰래 쪽지를 쥐여준다. 그곳에서 그녀가 기다린단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독일로 떠난 뒤였다.

다뉴브강을 따라 운항하는 우편 선박을 타고 백작 부인이 사는 성으로 되돌아간다. 그 배에는 성직자도 함께 타고 있었는데, 그 역시 백작 부인의 부탁으로 신랑감인 그의 소재를 찾기 위해서 이탈리아로 보내진 심부름꾼이었다. 자신이 그 상대임을 말할 수 없어 “그는 어떤 새장에도 갇혀있지 않고 신나게 노래 부르는 새와 같은 사람”이라고 하자, 성직자가 “타향을 떠돌아다니고 밤에는 골목길을 헤매고 남의 집 문전에서 잠을 자는 친구”라고 대꾸하여 기분이 언짢아, “어른께서 잘못 들은 것 같다. 그는 전도유망한 청년이며 돈도 잘 관리한다”고 응수한다.

결혼식을 위해 성으로 돌아오니 여행 도중 만났던 화가 중 한명이 “사랑은 인간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가장 대담한 개성의 표현이며, 그 형형한 눈빛으로 신분과 계급의 아성도 무너뜨릴 뿐 아니라 세상마저도 그 앞에서는 너무 비좁고, 영원도 오히려 짧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 화가는 그가 백작 부인의 수양딸과 결혼이 예정되어 있고, 그녀는 백작 부인이 문지기인 삼촌과 함께 살도록 해주어 이곳에 살고 있으며, 결혼 후 백작이 준 정원과 포도밭이 딸린 작은 성에서 살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소설에는 주인공이 독일 어느 곳에서 아버지 일을 돕는지 언급하지 않고 있다. 다만 작가 아이헨도르프는 프로이센 태생으로 현재는 폴란드 땅인 루보비츠성의 귀족 가문 출신이다. 이 소설은 아버지가 아들을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내치자, 방랑자인 아들이 여행을 통해 행복을 찾아 나서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다만 아버지의 질책이 아들의 장래를 위한 부정(父情)에 기인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아들 역시 넓은 세상 여행 과정에서 백작 부인의 수양딸인 ‘아름다운 여인’과 팔자를 고친 사실을 아버지에게 알리려 하지 않으며, ‘아름다운 여인’ 역시 삼촌 슬하에서 자란 때문인지 남편 될 사람의 부모에 대한 언급도 없다. 자립심과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서양인이어서 그런 것일까? 건달은 결혼 후 다시 로마로 떠나기로 결심한다. 18~19세기 로마는 유럽인들에게 꼭 봐야할 명소였으며, 특히 영국 젊은이들은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2~3년 동안 여행하는 ‘그랜드투어’에 나서기도 하였다.

주인공이 로마로 가는 과정에는 걷거나 우편 마차를 이용하며, 비엔나로 돌아올 때는 다뉴브강을 운항하는 우편선을 이용한다. 당시 유럽에는 이미 국경을 넘는 국제우편 제도가 확립되어 있었고, 이 경로를 따른 여행 또는 역참의 숙박제도가 시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건달은 집을 떠나 백작 부인의 수양딸과 결혼해 아버지가 말했던 ‘밥벌이까지 해결하는 행운’을 걸머쥐게 된다. 작가는 당대의 시인이다. 이 때문에 소설에는 아름다운 시어들이 포함되어 있고 시가 여러 편 등장한다. 둘의 결혼은 사랑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건달인 주인공의 정원사와 세관원으로서의 성실성이 결정적이란 생각이 든다. 어쨌든 패기로 집을 뛰쳐나온 것이 행운을 가져다주고, 여행은 건달의 인생 행로를 탄탄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동화 같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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