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떠나는 여행] <독서신문>은 여행과 관광이 여의치 않은 코로나 시대에, 고전이나 여행기에서 기술된 풍광과 문화를 소개하는 ‘책으로 떠나는 여행’이란 칼럼을 연재합니다. 칼럼은 『세상을 걷고 추억을 쓰다』라는 여행기의 저자이며, 파키스탄, 미국, 일본, 영국에서 문화담당 외교관으로 근무한 황현탁씨가 맡습니다. |
⑤“사람을 파는 죄와 죽이는 죄는 다르지 않다” [황현탁의 책으로 떠나는여행-혜초의 『왕오천축국전』]
④ 운명에는 겸손, 삶은 치열하게-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황현탁의 책으로 읽는 여행]
③ 속좁기로는 1등인 그리스 신들-호메로스의 『일리아스』
② 존 번연의 ‘꿈’속의 천국 여행 『천로역정』
①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숫자 12가 의미하는 것은
『하멜표류기』는 1653년 8월 16일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직원이던 헨드릭 하멜이 탄 선박 이 풍랑에 난파돼 제주도에 표착한 뒤, 1666년 9월 4일 조선을 탈출해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인도네시아로 귀환하기까지의 과정을 담고 있다.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 총독에게 올린 이 보고서에는 당시 조선 국토의 이모 저모와 조선 관리는 물론 평민들의 삶과 생각 등이 생생히 그려져 있다. 하멜은 일행 중에서 ‘서기’역을 담당했다. 보고서는 당초 조선 억류 기간인 13년 20일 동안의 보수를 청구하기 위해 작성한 것이었다고 한다. 네덜란드어 원제는 『1653년 바타비아(자카르타의 당시 명칭)발 일본행 스페르베르호의 불행한 항해일지』이다.
하멜은 1653년 1월 10일 네덜란드를 출발, 자카르타를 경유해 타이완의 안평(安平, 타이난의 항구) 주재 관리 호송 임무를 수행한 뒤 일본 나가사키로 향하던 중 풍랑을 만나 제주도 대정에 상륙한다. 전체 선원 64명 중 당시 생존 선원은 36명이었다. 초기 기록물은 일자별로 기록했으나 시일이 지나면서 중요내용을 요약, 기록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10월 29일에는 자신들보다 앞선 1627년 역시 풍랑으로 제주도에 표착한 뒤 한양의 조정에서 일하고 있던 네덜란드 통역관 박연(Jan Janse Weltevree)을 만나 일본 출국이 허용되지 않을 것이란 사정을 청취하게 된다. 이어 1654년 5월 초에는 첫 탈출을 시도하다가 발각되었고, 5월 말 한양 이송명령에 따라 몸이 묶인 채로 해남-나주-전주-공주를 거쳐 한양에 도착한다. 박연의 통역을 통해 일본에 보내달라고 요청하지만 ‘외국인은 국외로 보낼 수 없다. 조선에서 일생을 보내야 한다’는 명에 따라 왕실 호위병으로 일한다. 1655년 3월에는 일행 중 2명이 청나라 사신에게 접근해 도움을 요청하다 발각돼 투옥되었고, 1656년 3월에는 전라도 강진 작천(鵲川) 전라병영으로의 유배가 결정된다. 1663년 당시 생존자는 22명으로 줄어든다. 이들은 여수 12명, 순천 5명, 남원 5명으로 분산, 수용된다. 1666년 ‘섬에 가 솜을 사 올 배’를 구한다는 명목으로 조선 사람에게 부탁해 배를 구했다. 이중 하멜과 의사(船醫) 등 8명이 출항해 일본 고토(五島)에 도착한다. 이후 나가사키에 은닉해있다가 1년 뒤인 1667년 10월 25일 귀국길에 오른다.
내가 읽은 『하멜표류기』 번역본에는 하멜의 일지 외에 나가사키에 상륙한 후 ‘입국담당관리’인 부교(奉行)와의 문답서가 포함되어 있는데, ‘항해전말경위서’와 비슷한 내용이다. 배와 승무원 현황, 조선의 사정과 생활, 석방요청이나 탈주 노력 등에 대해 단문단답 형식으로 기술돼 있다. 예컨대 “잔류 인원을 일본으로 데려올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에는 “일본 황제가 조선 국왕에게 편지로 부탁하면 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라는 답변도 들어있다.
<조선국에 관한 기술>에는 조선의 지리적 위치와 크기, 기후와 농어업, 국왕의 절대적 권위, 기병과 보병의 장비와 임무, 국왕의 고문과 관리, 국왕 및 귀족의 수입과 재정운용, 형벌과 태형제도, 사찰과 승려제도, 가옥과 가구, 결혼과 교육, 무역과 상업, 도량형과 계산, 언어와 문자, 국왕의 행차 등을 소개하고 있다.
네덜란드에서도 청어를 많이 먹는지 “12월, 1월, 2월에는 청어가 많이 잡히며, 처음 2개월 동안 잡히는 청어는 네덜란드 것과 비슷하지만, 마지막 2개월간 잡히는 것은 크기가 다소 작다”고 쓰여있다. 심지어 동해에서 북극해의 러시아 ‘바이가치 섬’으로 통하는 수로가 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 당시에도 이미 북극해 인근에서 청어가 많이 잡힌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해볼 수 있다. 1662년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려 집과 집 사이에 굴을 뚫어 놓은 것을 봤다든지, 발이 눈에 빠지지 않도록 ‘설피’를 착용했다는 기록도 있다.
각종 형벌과 관련해서는 ‘곤장’으로 볼기를 치는 형벌이 자주 언급되어 있다. 보병이 50회분의 화약과 총알을 준비하지 않으면 곤장 5대, 간통한 사람은 50~60대, 승려가 육식, 육체관계를 가지면 70~80대, 그 외에도 발바닥이나 종아리를 때리는 벌 등이 기록되어 있다. 제주에서는 탈출하다 발각된 대원이 25대씩 맞았고, 한양에서는 청나라 사절에게 호소했다가 발각된 2명의 대원이 50대씩을 맞기도 하였다.
조선의 풍습과 관련해서는 ‘노예 숫자가 전 국민의 절반 이상’ ‘경치 좋은 곳의 사찰은 귀족들의 매춘굴이나 요정으로 사용되고, 보통 사찰에는 중들도 음주로 취해 있기도 한다’ ‘남자는 먹여 살릴 수 있으면 아내를 몇 사람이라도 얻을 수 있으며 여자를 노예처럼 다룬다’ ‘부모 상중에는 관직에 오를 수 없고 사직해야 하며, 여자를 가까이할 수 없고 상중 아이가 태어나면 사생아 취급한다’ ‘국민들은 물건을 훔치고 거짓말을 하고 속이는 경향이 강하다’고 적고 있다. 또 ‘전염병 환자들은 초막으로 보내지며 지나는 사람은 침을 뱉고 발생한 집은 지붕에 표시한다’ ‘네덜란드에 대해 아는 게 없으며 포르투갈인과 같은 남만국으로 부른다’ ‘남녀불문하고 담배 피우지 않는 사람이 드물다’ ‘국왕행차 때에는 청원 상자를 준비하여 누구든 억울한 일을 호소할 수 있도록 하여 직접 처리한다’는 내용도 담겨있다.
이와 별도로 ‘명나라, 청나라(타타르로 번역) 등 중국 왕실에 대한 사대만 있을 뿐 조정의 관리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바깥 물정에 대하여는 관심을 갖지 않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겪었는데도 불구하고 대포 등 신무기를 구비한 배가 난파되어 파편들이 해안에 떠다녀도 주워 불태울 생각만 했지 이를 활용해 병기나 항해술 같은 기술을 배울 생각은 하지 않고 있다’ ‘억류된 13년 동안 춤이나 추게 하거나 잡역만 시키는 어리석음에 기가 찰 따름이다’이라는 글귀도 있다. 또 “자신들을 대하는 지방관서의 관찰사 등의 ‘개인적 취향’에 따라 노역, 식량배급, 외출 등 ‘엿 장사 마음대로’의 처우를 해주고 있다”고 쓰여있다. 반면 일본에 대해서는 ‘교역을 통해 네덜란드(和蘭으로 부름)의 의술, 과학기술이 발전되었음을 알고 공부하고 배우는 난학(蘭學)이 에도시기(1605~1868) 내내 활기를 띠었다’고 우호적으로 적고 있다.
하멜표류기는 제3세계, 특히 서양인이 쓴 최초의 조선 기록이다. 당시 푸른 눈의 서양인이 제주와 한양을 오가면서 체험한 문화와 풍습을 소개하고 있다. 그의 눈에 비친 조선은 흉년이 들지 않은 해에 간신히 먹는 문제가 해결될 정도의 나라였고, 타타르족에게 연간 수차례의 조공을 바쳐야 하는 ‘처량한 신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