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영 감독 “‘정말 먼 곳’은 시(詩)를 닮은 영화다”
박근영 감독 “‘정말 먼 곳’은 시(詩)를 닮은 영화다”
  • 송석주 기자
  • 승인 2021.04.02 07:2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근영 감독 [사진=안경선 PD]

박근영 감독의 새 영화 <정말 먼 곳>이 최근 개봉했다. 전주국제영화제, 서울독립영화제, 탈린블랙나이츠영화제 등 수많은 국내외 영화제에 초청될 정도로 작품성을 인정받은 영화다. 박 감독은 2018년 세월호 희생자를 다룬 영화 <한강에게>로 주목받았다.

<정말 먼 곳>은 사회가 정상으로 규정한 것으로부터 벗어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서울을 떠나 강원도 화천에 정착한 ‘진우’(강길우)는 딸과 함께 양떼목장을 운영한다. 하지만 연인인 ‘현민’(홍경)과 여동생 ‘은영’(이상희)이 화천으로 찾아오면서 진우의 일상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카메라는 우리 곁에 가까이 있으면서도 멀게만 느껴지는 존재들을 응시한다. 이를 통해 가깝다고 생각한 것들이 실은 저 멀리에 있고, 반대로 먼 곳에 있다고 여긴 것들이 내 주변에 자리하고 있음을 일깨운다. 일상의 낯선 순간들을 포착하는 영화인 것이다. 신작 개봉과 관련해 그의 영화 세계를 들어봤다.

- 국문학을 전공했는데. 영화로 들어선 계기는

“원래 영화감독이 꿈이었다. 그런데 고3 때 ‘감독이 되고 싶으면 영화를 전공하지 말라’는 얘기를 들었다. (웃음) 아버지 지인 중에 대학교수가 계셨는데 내게 국문학, 철학, 사회학 같은 걸 공부하는 게 어떻겠냐고 조언했다. 국문과를 가면 시나리오 공부를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공 수업을 듣다 시의 매력에 빠졌다. 시가 영화와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학교 방송국에서 영상 PD로 활동하고, 영화과 학생들의 단편영화 제작에 참여하면서 시와 영화 공부를 병행했다.”

- 인생 영화 중 하나가 이와이 슌지 감독의 <러브레터>(1995)라고 들었다. 좋아하거나 즐겨 읽는 책이 궁금하다

“대학 시절 심보선 시인의 시를 좋아했다. 『슬픔이 없는 십오 초』라는 시집을 늘 가방 안에 넣고 다녔다. 기형도 시인과 이병률 시인도 좋아한다.”

- <한강에게> <정말 먼 곳>의 주인공이 모두 시인이고, 시라는 소재에 집중한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내가 시를 좋아하다보니 영화를 만들 때 시에서 많은 영감을 얻게 된다. 특히 시의 속성과 영화의 속성이 만날 수 있는 지점들을 고민하는데,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시가 삽입되거나 시인이 자주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 같다.”

- 시와 영화는 어떤 면에서 닮았나

“무엇인가를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은유하는 방식이 닮았다. 가령 시가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고 사랑을 표현하는 예술이라면, 영화는 언어의 형태로 설명하기 힘든 것들을 이미지로 표현하는 예술이다. 이미지로 쓴다는 측면에서 시는 영화와 같다고 생각한다.”

- 영화에 박은지 시인의 「정말 먼 곳」이 삽입돼 있다. ‘정말 먼 곳’은 어떤 의미인가

“박은지 시인에게 시를 영화 속에 담고 싶다고 얘기했다. 시나리오를 쓰고 난 뒤 박 시인을 만나 왜 이런 제목의 시를 썼는지, 또 나는 어떻게 이 시를 해석하고 받아들였는지에 관해 대화했다. 박 시인은 ‘정말 먼 곳’이 도달할 수 없는 곳이라고 말했고, 나는 안식처라고 대답했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안식처가 나로부터 얼마나 멀리 있는가’라는 질문 자체가 ‘정말 먼 곳’이라고 생각한다. 시나리오를 보여주면서 그런 얘기를 나눴다.”

박근영 감독 [사진=안경선 PD]

- 롱테이크(long take,하나의 숏을 길게 촬영하는 기법)와 롱숏(long shot, 카메라를 피사체로부터 멀리하여 촬영하는 기법)을 통해 ‘빈 공간’ 혹은 ‘여백의 이미지’를 창출하는 방식이 인상적이다. 시적 영화를 만들기 위한 구체적 방편인가

“시적 영화를 롱테이크나 롱숏으로 구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기법들을 얼마나 의미 있게 사용할 것인가, 라는 질문이다. 가령 내가 느끼고 있는 장면의 분위기를 제대로 담아서 관객들에게 전달하는 게 중요한데, 롱테이크나 롱숏을 사용했을 때 표현할 수 있는 여지들이 더 많은 것 같다. 특히 롱테이크의 경우 무작정 길게 찍는다고 가능한 것은 아니다. 긴 시간을 감당해낼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 그건 영화를 지켜보는 관객의 집중력일 수도 있고, 배우의 연기일 수도 있으며, 장면 그 자체일 수도 있다. 그러한 것들 중 하나라도 부족하면 숏의 길이를 줄일 수밖에 없다.”

- <정말 먼 곳>에는 미혼모, 퀴어, 치매 노인 등 소수자성을 가진 사람들이 유사 가족을 이루며 살고 있다

“처음 이 이야기를 구상할 때, 화두로 삼았던 게 ‘거리감’이었다. 그건 친구나 연인, 가족 간의 거리감일 수도 있고 개인과 사회 간의 거리감일 수도 있다. 영화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어떻게 보면 우리와 다소 거리감이 있는 사람들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만 우리가 잘 모르거나 공감하지 않으려 한다는 측면에서. 나는 그들이 영화의 배경인 화천이라는 공간과 만나면서 발산하는 분위기에 집중했다. 그리고 이 영화에 다양한 동물이 등장하는데, 소수자들이 이루고 있는 가족의 형태를 기반으로 한편의 우화를 만든다고 생각하면서 찍었다.”

- 이 영화는 양의 죽음으로 시작해서 양의 탄생으로 끝난다. 도식적으로 말하자면 죽음에서 삶으로 나아가는 수미상관의 구조로 보이는데

“그런 구조를 취했을 때 조금 더 우화적인 느낌을 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동시에 그것이 삶이라는 굴레 혹은 인생의 순환을 표현한다고 생각했다. 그 굴레와 순환은 삶과 죽음 사이의 거리감이기도 하다. 우리가 멀다 혹은 가깝다는 말을 자주 쓰는데 이는 꽤 막연한 표현이다. 어디서부터 멀다고 할 수 있는지, 어디서부터 가깝다고 할 수 있는지 정의내리기가 쉽지 않다. 가령 영화 속에 나무가 자주 등장하는데, 어디서부터 나무고 어디서부터 숲인가. 혹은 어디서부터 줄기고 어디서부터 껍질인가, 라는 것. 극중에 ‘설’이라는 아이가 아빠를 엄마라고 부르는데, ‘엄마라는 존재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질문도 이 영화에서 매우 중요하다. 아주 모호하지만 한편으로는 어떤 본질로 나아가는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먼 곳>은 그런 질문들로 가득한 영화다.”

- 극중에 많은 캐릭터가 등장한다. 개인적으로 기도영 배우가 연기한 ‘문경’ 역에 감정이입이 많이 됐다. 사랑한 사람이 동성애자이고, 치매에 걸린 할머니를 간호하고, 젊은 나이에 지방에 살면서 자기 욕구를 제대로 실현하지 못하는 것 같은 모습이 조금은 희생적으로 보인다

“배우들에게 처음 시나리오를 보여줬을 때, 관객들에게 가장 사랑받을 캐릭터로 다들 ‘문경’을 꼽았다. 이해심도 넓고, 자기의 고통을 잘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니까. 나는 영화를 만들면서 문경의 욕망은 무엇일까, 생각했다. 문경은 기본적으로 화천을 떠나고 싶어 하지만 떠나지 못하고 묶여 있는 사람이다. 영화에 당나귀 한 마리가 나오는데, 말하자면 문경은 그 당나귀 같은 존재다. 당나귀는 양처럼 자유롭게 방목하지도 못해서 항상 묶여 있고, 또 한 마리이다 보니 무척 외로워 보인다. 그러나 목장을 찾는 손님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동물이다. 사실 문경은 마냥 희생하는 느낌이라기보다는 자기 나름대로의 신념과 고집 같은 게 있는 캐릭터다. 그리고 문경은 영화를 보는 관객과 가장 닮아 있다. 다수의 관객층에게 가장 가까운 인물이 아마 문경일 것이다.”

- 영화 속 ‘시 수업 장면’에서도 등장하는데, 시 창작에서 가장 중요한 게 고정관념을 깨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당신이 영화를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태도가 있을까

“인물을 제대로 된 태도로 바라보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 이를테면 개인 혹은 공동체로서 갖고 있는 아픔과 사건을 영화로 다루게 되었을 때, 그것을 어떻게 하면 전시하지 않고 진정성 있게 들여다볼 수 있는가. 영화를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얼마나 깊이 있게 받아들이게 할 수 있는가. 말하자면 그런 것들이다. 어떤 영화는 사건을 막무가내로 전시하지만, 어떤 영화는 사건을 가슴 깊이 느낄 수 있게 다룬다. 나는 그 격차가 감독이 사람과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의 차이에서 비롯한다고 생각한다.”

- 다음 영화도 시가 주된 소재인가

“시적인 영화에 대한 탐구를 계속하고 싶다. 시적인 영화를 만들어가는 데 반드시 시나 시인이 등장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영화가 갖는 시적인 속성이 무엇일까. 그 질문에 내 나름대로 더 깊이를 더하고 싶다.”

[독서신문 송석주 기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비회원 글쓰기 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서초구 논현로31길 14 (서울미디어빌딩)
  • 대표전화 : 02-581-4396
  • 팩스 : 02-522-6725
  • 청소년보호책임자 : 권동혁
  • 법인명 : (주)에이원뉴스
  • 제호 : 독서신문
  • 등록번호 : 서울 아 00379
  • 등록일 : 2007-05-28
  • 발행일 : 1970-11-08
  • 발행인 : 방재홍
  • 편집인 : 방두철
  • ⌜열린보도원칙⌟ 당 매체는 독자와 취재원 등 뉴스 이용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 반론이나 정정보도, 추후보도를 요청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두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고충처리인 권동혁 070-4699-7165 kdh@readersnews.com
  • 독서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독서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readersnews.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