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 명문장] 일상을 이루는 행동, 생각, 기억의 모음 『사생활들』
[책 속 명문장] 일상을 이루는 행동, 생각, 기억의 모음 『사생활들』
  • 안지섭 기자
  • 승인 2021.03.28 11: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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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은 몇 개의 문장만으로도 큰 감동을 선사하고 알찬 정보를 제공합니다. ‘책 속 명문장’ 코너는 그러한 문장들을 위해 마련한 공간입니다.

[독서신문 안지섭 기자] 여행 대신 책을 품게 되니 삶에 막연함이 찾아올 때면 더듬거리며 책 속에서 길을 찾는 방법 외엔 모르는 사람이 됐다. 주방은 서재가 되고 식탁은 책상이 되었다. 식구들이 밥을 먹으려고 식탁으로 몰려들 때는 재빨리 책을 구석진 곳에 밀어 놓아야 했지만 혼자 있는 시간이면 어김없이 책을 끌어당겼다. 어느 순간 박완서의 산문집을 읽으며 꽈리고추의 꼭지를 따는 기술이 생겼다. 하지만 버지니아 울프의 문장을 이해하며 음식을 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런 날의 저녁 메뉴는 배달 피자나 치킨이다.<45쪽>

요즘 나는 고양이와 개를 생각하며 자주 운다. 사랑하기 때문에 울어야 할 일이 많다. 그러나 나는 기꺼이 사랑할 것이다. 사랑하는 것은 눈물까지 포함하는 일이기 때문이다.<62쪽>

매일 비슷한 시간에 식구들이 모여 저녁 식사를 하는 삶, 한 달에 한 번은 빠짐없이 남편의 월급이 통장에 꽂히고 그 돈으로 작게나마 계획이라는 것을 세우는 삶, 감당할 수 없이 불행한 일이 생기더라도 그 짐을 나눠 줄 사람이 옆에 있을 거라는 믿음과 부부 중 한 사람이 갑자기 떨어진 아이의 성적을 걱정할 때 그럴 수도 있는 거라며 허허 웃어 주는 사람이 있는 삶, 공과금을 자동이체하는 통장에 항상 비슷한 잔액이 남아 있는 삶. 누군가에게는 그토록 평범한 하루하루가 나에게는 왜 그리도 어려웠는지.<92쪽>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에 휘둘릴 때나 내가 누구인지 모를 때, 글 쓰는 일에 확신이 없을 때, 내 마음을 몰라주는 사람 때문에 서러울 때, 억울하고 분통이 터질 때, 실타래처럼 꼬인 일을 풀기 직전에 나는 다시 찻물을 끓인다. 마실 차를 선택하고 좋아하는 찻잔을 꺼내고 가만히 멈추어 차를 우리고 차향을 맡고 천천히 차를 마시는 일에 집중하면, 나를 둘러싼 안개가 걷히면서 흐릿했던 내 존재가 분명해진다. 나를 절망에 빠뜨렸던 사람을 슬그머니 용서하게 되고 초라하게 늙어 가고 있는 나를 사랑하게 된다.<109쪽>

『사생활들』
김설 지음 | 꿈꾸는 인생 펴냄 | 204쪽 | 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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