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고 푸른 바다를 항해 시켜주는 그대
깊고 푸른 바다를 항해 시켜주는 그대
  • 김혜식 수필가/前 청주드림 작은도서관장
  • 승인 2021.03.24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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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식 수필가/前 청주드림 작은도서관장

자연에는 비약(飛躍)은 물론 거짓도 없다. 순리를 뒤따를 뿐이다. 화창한 봄날 훈풍이 꽃을 피우면 벌과 나비가 찾아들어 머잖아 결실을 맺게 한다. 매화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지면 나뭇가지마다 알알이 매실이 달린다. 짧은 봄밤 푸른 달빛 아래 하얗게 피어나는 순백의 배꽃이 지면 가을엔 탐스러운 배들이 가지가 휘도록 열리지 않던가.

이로 보아 자연처럼 탈속(脫俗)하고 순연한 모습은 없는 듯하다. 찬란한 봄꽃의 향연을 위하여 어쩌면 자연은 그토록 혹독한 겨울철 동장군과 삭풍을 용케 견뎠는지도 모르겠다. 지난 가을날 모과나무에 열린 은은한 향을 풍기는 모과를 바라보면서 문득 생의 열매에 대하여 생각에 잠긴 적이 있다. 아름답던 청춘이 소리 없이 시드는 줄 모르고 눈만 뜨면 삶의 노예로 전락 되어온 지난 삶이었다. 무엇이 그토록 내 안이 허허로웠기에 그리도 채우려고 안간힘 썼던가.

돌이켜보니 그것은 오로지 가족들을 위한 발버둥이었다. 지난 시간, 봄이 오면 봄꽃을 감상하는 일조차 나에겐 사치였다. 여름날 소낙비를 피하기 위하여 잠시 걸음을 멈추는 시간조차 아껴야 했다. 일상에서 분초를 다투며 늘 서둘러 그날 갈 길을 재촉해야 했다. 이런 형국이다 보니 내 안에 자리한 마음의 문은 항상 굳게 빗장이 걸려있었다.

단 한 번도 그것을 열어볼 엄두조차 내지 못하였다. 당장 눈앞의 일이 산적해 있으니 그것을 해결하는 일이 항상 급선무였다. 일상을 이토록 삶에 떠밀려 지낼 즈음 그는 나를 찾아왔다. ‘정취를 달이는 약탕기’라고 말할 만큼 그는 풍부한 감성과 낭만, 그리고 따뜻한 자신의 품으로 나를 포옹하기 시작했다. 사랑의 온도만큼은 누구도 따를 자가 없을 정도로 항상 뜨거웠다. 또한 자비까지 갖췄으니 어찌 내가 이에 반하지 않으랴. 나는 그가 내게 베푸는 사랑에 흠뻑 빠져 날마다 곁에 그를 두고 가슴으로 수없이 껴안곤 하였다. 밤마다 그의 팔베개를 벤 채, 삶의 애환, 내 안의 슬픔을 밤새도록 넋두리 하여도 그는 항상 넓은 품으로 말없이 나의 말에 귀 기울이어 주었다. 단 한 번도 나의 넋두리에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리지 않았다. 웬만하면 힘에 부쳐 버겁다고 하거나 힘든 세상에 남의 일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다고 항변할 텐데 그는 오로지 묵묵히 마음의 살갗이 터지는 듯한 삶 속 통증을 얄팍한 가슴을 오롯이 내어주면서까지 부드러운 손길로 보듬어 주었다.

내가 삶의 비의(悲意)에 젖을 때마다 온기 서린 목소리로 달래어 줄 땐, 마치 부모님처럼 미덥기조차 했다. 그를 만난 후 나는 그동안 마음의 문을 수없이 열고 닫으며 마음 속 거울에 내려앉은 속진(俗塵)들을 닦을 수 있는 여유도 얻었다. 또한 성찰을 통하여 진정 사람답게 사는 일이 무엇인가를 체득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어찌 얇은 몸으로 이토록 내게 성자와 같은 존재로 다가올까? 그의 얄팍한 몸뚱이지만 나에 대한 허물, 고통, 그리고 기쁨과 슬픔을 가슴으로 느끼고 공감하는 능력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보다 월등하다. 오죽하면 그를 일컬어 인생 바다를 멀리까지 항해 시켜주는 지혜로운 배라고 일렀으랴.

지식, 정보, 상식, 교양, 지혜 및 심지어 논리적인 사고력, 창의성까지 안겨주는 그이지만, 무엇보다 더 중요한 감흥은 그의 품속에 품고 있는 인간학(人間學)이다. 나 또한 이 얇디얇은 종이에 나의 사상과 철학, 삶 속에서 사유한 사물에 대한 심적 나상(心的裸像)을 진솔히 토로하련다. 그리하여 나처럼 삶 속에서 때론 갈 길을 잃고 삶이 안겨주는 무게에 짓눌려 마음의 문을 겹겹이 닫는 이들에게 꿈과 사랑, 희망을 한껏 안겨주는 글을 쓰고자 한다.

내가 사랑한 그는 다름 아닌 한 권의 책이다. 사십에 문단에 입문하여 여든 살에 숨을 거두기까지 쉼 없이 글밭을 일궜던 박완서 소설가다. 그의 소설집 『친절한 복희씨』를 독서하며 새삼 노년층 풍속을 세밀하게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었다. 하긴 문학에 무슨 나이가 걸림돌이 되랴. 빅토르 위고는 예순 살에 소설 『레미제라블』을 펴냈다. 괴테는 여든둘에 『파우스트』를 완성했고 톨스토이는 일흔 넘어서 『부활』이 햇빛을 보게 했다. 나 또한 이제라도 펜의 힘을 세상을 응시하는 선명한 창(窓)으로 삼아 문학의 깊고 푸른 바다 속에서 명작이라는 대어(大魚)를 낚는 일로 내 인생의 결실을 알차게 맺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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