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 명문장] 문학으로 온 시대를 살아낸 세기의 인문학자의 궁극적 질문 『시대로부터, 시대에 맞서서, 시대를 위하여』
[책 속 명문장] 문학으로 온 시대를 살아낸 세기의 인문학자의 궁극적 질문 『시대로부터, 시대에 맞서서, 시대를 위하여』
  • 안지섭 기자
  • 승인 2021.03.14 11: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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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신문 안지섭 기자] 유한성의 경험에 모순이라는 주사약을 찔러넣는 순간 그 경험에는 드라마가 도입된다. 인간은 자신의 목숨, 자원, 능력이 유한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유한성에 보복하려는 충동과 욕망을 갖고 있다. 그 욕망은 무한하다. 인간은 무한한 생명, 무한한 능력, 무한한 권력, 무한한 지식처럼 무한한 것을 찾고 무한한 것을 그리워한다. 유한한 존재의 내부에 무한한 욕망이 들어 있다는 것은 기이한 모순이다. 이 모순 때문에 인간은 내부로부터 쪼개어져 있다. 섹스와 죽음에 대한 인간의 경험이 특이해지는 것은 이런 모순과 분열의 경험 때문이다. 그는 섹스하는 존재여서 유별난 것이 아니라 섹스에서 유한한 것과 무한한 것의 모순적 동시 공존을 경험한다는 사실 때문에 유별나다. 그는 죽는 존재여서 유별난 것이 아니라 죽음 앞에서 유한성과 무한성의 모순적 동시 공존을 경험하기 때문에 유별나다. 이 유별난 특성을 이야기 만드는 데 도입하는 것이 모순이라는 드라마의 주입이다. 섹스와 죽음처럼 오래된 것들이 이야기꾼에게 제기하는 도전은 이런 것이다.
“너는 진부한 것에서 진부하지 않은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14쪽>

이야기는 의미 없는 세계에 의미를, 희망이 없는 세계에 희망을, 정의가 없는 세계에 정의를 집어넣으려는 인간의 노력을 대표한다. 오래된 경험들이 인간에게 제기하는 도전치고 이보다 더 큰 것이 있는가? 인간이 이 세계에서 하는 일 중에 그 세 가지 작업보다 더 의미 있는 것이 있는가?<15쪽>

문학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지배적인 문화 형식이 아니고 대중의 문화적 삶에서도 중심적인 향유 대상이 아니다. 문학의 이 같은 위상 약화는 ‘문학하는 사람들’에게 상당한 무력감을 안겨주고 ‘지금은 문학하기 어려운 시대’라는 곤경을 호소하게 한다. 그러나 너무 기운 빠지기 전에 미리 좀 말하자면, ‘기업하기 좋은 시대’라고 말할 때와 같은 의미에서의 ‘문학하기 좋은 시대’라는 것이 있겠는가? 사실 역사상 어느 시대에도 문학은, 한국에서건 어디 다른 곳에서건 간에, 문학 그 자체의 행복을 위해 하늘에서 천사들이 내려와 나팔 불어주고 꽃을 뿌려주는 축복의 계절을 가진 적이 없다. 문학하기 좋은 시대라는 것 따로 있고 문학하기 어려운 시대라는 것이 또 따로 있어서 시절이 좋으면 번성하고 시절이 나빠지면 말라비틀어져 없어지기도 하는 것이 문학이라면 그런 문학에 ‘문학’이라는 명칭을 붙여줄 수 있겠는가? 지금은 문학이 축복받는 시대가 아니다. 그러나 문학이 불가능한 시대도 아니다. 문학이 어려운 시대에 문학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역설적 화두를 생각해보는 것이 지금 문학의 할일 가운데 하나이다.<20~21쪽>

다른 예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문학도 작가라는 존재의 정신의 자유, 표현의 자유, 양심의 자유, 일탈과 도전의 창조적 자유가 생명인 예술 분야이다. 그러나 시장시대에 문화콘텐츠로 생산되어야 하는 문학은 그런 자유를 반납해야 한다. 문화산업에, 대중 소비자들에게 시장시대의 행복과 만족을 팔아야 하기 때문에 콘텐츠 생산의 제1법칙은 ‘소비자를 행복하게 하라’이다. 문화산업은 오늘날 대중의 행복천사가 되어 있다. 소비자를 행복하게 하는 일은 나쁘지 않다. 그러나 문학이 행복천사의 나팔수가 되고 하수인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경우 인간의 삶을 왜곡해야 하고 삶의 진실을 희생해야 한다. 이것은 문학이 견딜 수 없고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누구든 시장의 신을 숭배하고 그의 명령을 따르기만 하면 번영과 안전을 얻을 수 있다고 믿게 하는 것이 시장시대의 행복신화이다.<24~25쪽>

『시대로부터, 시대에 맞서서, 시대를 위하여』
도정일 지음 | 문학동네 펴냄 | 352쪽 | 15,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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