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석주의 영화롭게] ‘라스트 레터’, 사람과 사랑을 부치다
[송석주의 영화롭게] ‘라스트 레터’, 사람과 사랑을 부치다
  • 송석주 기자
  • 승인 2021.03.06 07: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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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이 슌지 감독, 영화 <라스트 레터> 스틸컷

[독서신문 송석주 기자] 이와이 슌지의 <라스트 레터>는 그의 초기작 <러브레터>(1995)와 <4월 이야기>(1998)를 절묘하게 포개놓은 영화처럼 보입니다. 편지, 도서관, 첫사랑 등 이와이 슌지의 장기가 십분 발휘될 수 있는 소재들이 가득 들어있어요. 두 영화에서 활약했던 배우들 역시 곳곳에 포진해 있지요. 스토리와 소재, 배우들까지 감독의 이전 작품들과 닮아 있는 <라스트 레터>는 이와이 슌지가 자신의 오랜 팬들에게 바치는 선물 꾸러미 같은 영화입니다.

줄거리는 간단합니다. 유리는 죽은 언니인 미사키 앞으로 온 동창회 초대장을 조카 아유미로부터 전달 받고, 언니의 부고를 알리기 위해 동창회에 참석합니다. 거기에서 유리는 자신의 첫사랑인 쿄시로를 만나게 돼요. 하지만 쿄시로의 첫사랑은 유리가 아닌 미사키였죠. 어쨌거나 동창회 이후 두 사람은 편지를 주고받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편지 한 통이 아유미에게 잘못 전달되면서 영화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됩니다.

죽은 자를 애달파하는 산 자의 이야기는 사실 진부합니다. 그러나 <라스트 레터>는 이 단조로운 서사에 약간의 변주를 줘요. 영화는 첫사랑을 잃은 쿄시로, 언니를 잃은 유리, 엄마를 잃은 아유미의 시점이 번갈아가면서 전개되는데, 세 인물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각기 다른 플롯이 서로 교차하며 서사의 다양한 층위에서 극적 긴장을 높이고 있지요. 진부한 소재를 참신하게 엮어 이야기에 다층적인 의미를 생산하는 건 이와이 슌지의 장기 중 하나입니다.

이와이 슌지 감독, 영화 <라스트 레터> 스틸컷

세 인물이 주고받는 편지 속에서 죽은 미사키는 이른바 ‘부재하는 존재’가 되어 영화 내내 생동합니다. 미사키의 존재는 비단 플래시백을 통한 물질적 형상으로만 재현되는 게 아니에요. 현재의 시점에서 세 인물을 바라보는 카메라의 시선이 미사키의 시선처럼 느껴진다는 겁니다. 카메라가 편지를 쓰고 있는 세 인물을 바라볼 때 마치 사람이 바라보는 것처럼 미묘하게 움직이며, 결정적인 순간에 부상해 하늘 위로 떠오를 때가 특히 그렇습니다.

물론 이러한 카메라의 시선과 움직임은 관객에게 사건의 정보를 알려 주기 위한 설정 숏일 수도 있고, 이야기가 시작됐다(혹은 끝났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한 제스처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꼭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단지 상황 설명을 위한 카메라의 3인칭 관찰자 시선이 아니라 세 인물을 바라보는 미사키의 시선일 수도 있는 거예요.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누가 누구를 바라보고 있는 걸까요?”라는 질문으로 수렴하지요.

대개의 극영화에서 카메라는 자신의 존재를 관객에게 드러내지 않습니다. 감독은 ‘카메라가 찍고 있다는 사실’을 관객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노력하죠. 그래야 관객은 영화를 또 다른 현실로 인지하고, 스스로 영화라는 가상의 세계에 리얼리티를 부여하니까요. 하지만 때때로 감독은 카메라의 존재를 관객에게 인지시킬 때가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카메라의 ‘시점 이동’을 일부러 드러내는 건데, 이때 카메라는 영화의 또 다른 캐릭터가 되어 극을 추동합니다.

이와이 슌지 감독, 영화 <러브레터> 스틸컷

이와이 슌지의 데뷔작인 <러브레터>의 오프닝과 엔딩 시퀀스에서도 앞서 설명한 카메라의 시점 이동이 포착됩니다. 여기에서 카메라는 서서히 부상하며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한 여자를 멀리서 바라보는데, 이 순간에 흘러나오는 OST 제목이 공교롭게도 ‘His smile’이에요. 그러니까 여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단순한 카메라의 시선이 아니라 그녀의 죽은 연인일 수도 있다는 것은 합리적인 추론입니다. 이러한 카메라 움직임은 엔딩 시퀀스에서도 그대로 반복되지요.

이처럼 영화에서 카메라의 시점은 단일하게 규정할 수 없습니다. 반복하지만, 그것은 전지적인 카메라의 시점일 수도 있고, 영화 안팎에 존재하는 또 다른 누군가의 시점일 수도 있어요. 따라서 우리는 시점의 이동과 변화가 불러일으키는 효과와 그 이면적 의미 대해 자유롭게 상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라스트 레터>의 오프닝과 엔딩 시퀀스에서 부상하는 카메라의 움직임은 비로소 세 인물과 완전하게 이별하려는 미사키의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어요.

영화 후반부에 “언니가 된 것처럼 편지를 썼더니 언니 인생이 계속되는 것 같다”는 유리의 고백은 영화의 핵심을 건드리고 있습니다. <라스트 레터>는 세 인물의 플롯과 카메라의 시점을 적절하게 교차하고 이동시키면서 이미 죽고 없는 미사키를 살아있는 존재처럼 형상화하지요. 죽음을 유예하고 지연시킴으로써 망자를 끊임없이 스크린 위로 소환하고, 죽음에 신비한 생명력을 부여하는 영화라고나 할까요. 낡은 것은 소재이지 영화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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