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폭력 가해자들의 사과문에 없는 것
학교폭력 가해자들의 사과문에 없는 것
  • 서믿음 기자
  • 승인 2021.02.19 08:4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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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영 선수 자필 사과문. [사진=연합뉴스]
이다영 선수 자필 사과문. [사진=연합뉴스]

[독서신문 서믿음 기자] 학생 시절 당했던 폭력을 고발하는 이른바 ‘학교폭력 미투(metoo)’가 잇달아 발생하고 있다. 지난달 말 TV조선 예능 프로그램인 ‘미스트롯2’에 출연한 가수 진달래의 과거 학교폭력 가해 사실이 드러난 데 이어 이번에는 여자배구 이다영·이재영 자매(흥국생명 소숙), 남자배구 송명근·심경섭 선수(OK금융그룹 소속)가 잇달아 학교폭력 가해 사실이 확인됐다. 송명근·심경섭 선수는 국가대표 자격을 박탈당했고 무기한 출전정지 처분을 받았다. 이다영·이재영 자매는 무기한 출전정지에 국가대표 자격과 지도자 자격을 박탈당했다. 배구선수 출신인 어머니 김경희씨는 ‘장한어머니상’까지 반납해야 했다.

징계와 함께 가해자들은 혐의를 인정하고 피해자에게 사과했다. 공개적으로 사과문을 발표하고 자신의 잘못을 고백했지만 피해자들의 마음을 녹이기에는 아쉬운 점이 많았다.

이재영 선수 사과문. [사진=연합뉴스]
이재영 선수 사과문. [사진=연합뉴스]

먼저 이다영·이재영 자매의 사과문에는 올바른 사과 요소 중 빠진 것들이 많았다. 우선 ▲명확한 사과 대상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재영은 피해자를 “많은 분” 이다영은 “운동한 동료들에게”라며 모호하게 표현했다. 공개 사과문의 특성상 상세한 신상 언급이 어렵다고 하더라도 피해 대상을 명확히 언급하는 게 마땅하다. 사과 형식 역시 SNS가 아니라 피해자에게 비공개라도 사과문을 전달했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두 번째로 ▲무엇이 미안한지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 자매는 자신의 잘못을 “무책임한 행동” “잘못된 언행” “상처를 갖도록 한 언행” 등 경중을 가늠하기 어려운 표현으로 피해자의 마음을 위로하는 데 실패했다. 자세한 내용을 세세하게 언급하지는 않더라도, 과도하게 뭉뚱그린 단순화된 표현으로 오히려 상황을 단순화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구체적으로 피해자의 마음에 공감하는 언어도 부재했다. 『5가지 사랑의 언어』의 저자 게리 채프먼은 “사과는 구체적일 때 효과적이다. (중략) 뉘우침은 자신의 행동에 초점을 맞추며, 또한 그 행동이 상대방에게 해를 끼쳤음을 공감하는 일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했지만, 자매의 사과문에는 “고통의 시간” “힘든 기억” “트라우마”라고 뭉뚱그려 표현됐고, 또 그에 관한 공감의 언어가 “죄송합니다” “사과드립니다”라고 건조하게 표현됐다.

반면 송명근의 사과문은 형식적인 면에서 상대적으로 모범 사과문에 가까웠다. 그는 피해자를 “피해자님”으로 지칭하며 사과 대상을 분명히 했고, “(폭로 내용은) 모두 사실입니다. 전부 시인합니다. 저는 학교폭력 가해자가 맞습니다”라며 가해 사실을 분명하게 인정했다. 또 “제아무리 어리고 철없던 시절이었다 하더라도 (중략)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드렸다는 것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라며 자기변호 시도를 원천 차단했다. 또 “연락드려 진심 어린 사죄를 전달하고 용서를 구하고 싶(다)”면서도 행여 피해자에게 부담이 될까 봐 “가해자를 다시 마주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더더욱 죄송합니다”라며 ‘나는 사과할 준비가 됐으니 너는 받아들여’라는 식의 태도를 지양했다.

사과에 있어 중요한 건 형식적인 요소가 아닌 진정성이다. 형식적인 요소는 진정성을 가늠할 수 있는 지표일 뿐 그 안에 숨은 진심이 드러나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 게리 채프먼은 “본질적으로 용서는 징벌을 단념하고 상대방을 다시 용납하는 ‘선택’이다. 그것은 신뢰를 되찾을 수 있도록 과실을 용서하는 것이다. 용서란 ‘나는 우리의 관계를 소중히 여겨요. 따라서 당신의 사과를 받아들이며 더 이상 고의를 요구하지 않기로 할게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그것은 선물이다. 하지만 강요당하는 선물은 선물이 아니다”고 말했다.

2015년 멕시코를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원주민과 운동가들을 만난 자리에서 “하느님의 이름으로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많은 중대한 죄를 저질렀다”며 “‘아메리카 정복’ 시대에 교회가 원주민에게 저지른 범죄에 대해 겸허하게 용서를 구한다”고 사과했다. 이어 공개 미사에서 “우리의 양심을 성찰하고, ‘용서해 달라’고 말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면 얼마나 가치 있을까”라고 말해 큰 박수를 받았다. 학교폭력 가해자들이 용서받기 위해 감내해야 할 건 분명하다. 사과 기술과 필력이 부족해 진심을 제대로 전하지 못했다면 ‘노력’이 필요하고, 온전히 전했는데 용서를 받지 못했다면 ‘인내’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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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19 11:05:19
사과문인지 변명문인지 꺼림칙한 글에 피로감이 들었는데, 한 줄 한 줄 까이는 걸 보니 통쾌하네요.

잘 썼다는 송명근 선수 사과문이 궁금해서 찾아보니 '사과'문이 맞네요. 바로 비교해 볼 수 있도록 해당 사과문도 기사 안에 이미지로 함께 제공돼 있었으면 더 좋았겠단 생각입니다. 기사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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