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코뿔소와 펭귄이 함께 떠나는 긴긴 여정 『긴긴밤』
[리뷰] 코뿔소와 펭귄이 함께 떠나는 긴긴 여정 『긴긴밤』
  • 안지섭 기자
  • 승인 2021.02.15 17: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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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신문 안지섭 기자] 어떤 무리를 가족으로 규정짓는 조건은 무엇일까. 그에 대한 가장 쉬운 답은 몇 번의 밤을 함께 보냈다는 것이 아닐까. 마치 이 소설의 제목은 그러한 의도로 지어진 듯하다. 아내와 딸을 잃은 코뿔소 노든, 그리고 그와 함께 ‘긴긴밤’을 보낸 여러 동물의 모습들이 애처롭지만 끈끈한 관계를 맺고 있는 어느 가족의 모습을 닮아있다.

이야기는 세상에 단 하나 남은 흰바위코뿔소 노든의 외로움을 주로 보여준다. 코끼리들의 품에서 태어난 코뿔소 노든의 자유를 찾는 과정은 눈물겹다. 야생에서 만난 아내와 딸이 밀렵꾼들에 의해 살해당했으며, 동물원에서 잡혀가 같은 우리를 썼던 코뿔소 앙가부는 뿔을 잘라가려는 밀렵꾼들에게 죽임을 당한다. 우연한 계기로 동물원을 탈출하게 되는데, 함께 탈출했던 펭귄 치쿠는 아침에 일어나보니 싸늘하게 죽어 있다. 인간에 대한 복수심으로 가득한 노든에게 새끼 펭귄만이 유일한 가족으로 남겨진다. 그에게 생의 의미와 즐거움을 일깨워주었던 아내와 딸, 앙가부, 치쿠가 떠났는데 새끼 펭귄을 당연한 듯 가족으로 삼는 노든의 모습이 울림을 준다.

이야기는 동물이 다른 종의 품에서 자라면 그 동물인 것처럼 행동한다는 어느 이론을 적극 차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동물들이 쉽게 자신들끼리 자유롭게 관계를 만드는 효과를 낳는다. 코끼리 품에서 태어난 노든도 자신이 코끼리인 줄 알았다. 펭귄 ‘나’도 노든과의 이별을 앞둔 상황에서 “나는 코뿔소가 키웠으니까, 펭귄이 되는 것보다는 코뿔소가 되는 게 더 쉬워요”라며 자신의 정체성이 펭귄보다는 코뿔소에 가깝다고 말한다. 작가는 동물들의 이러한 습성이 종 간의 경계심과 긴장감을 해소하는 장치로 기능하길 의도했던 것일까.

동물에게는 이름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도 이 이야기가 주는 메시지 중에 하나이다. 동물들은 그저 살기 적당한 장소와 먹을 것만 있으면 된다. 실은 ‘노든’이라는 이름도 아내와 딸 곁에 쓰러진 코뿔소를 잡아다 동물원에 놓은 인간들이 붙여준 이름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노든은 펭귄 ‘나’에게 이름을 붙여주지 않는다. “나한테도 이름이 있으면 좋겠어요”라고 이름 지어주기를 바라는 ‘나’에게 노든은 “날 믿어. 이름을 가져서 좋을 거 하나도 없어. 나도 이름이 없었을 때가 훨씬 행복했어”라고 답한다. 이름을 붙여주지 않음으로써 새끼 펭귄 ‘나’에게 이름보다 값진 선물을 주는 듯하다.

흔히 동물의 의인화는 동물들의 시선을 통해 인간들의 탐욕과 야만성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사용된다. 이 이야기도 마찬가지로 그러한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다만, 인간의 야만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한발 더 나아가 종을 뛰어넘은 동물들 간의 사랑과 연대의 정서가 깊게 묻어나오게 한다. 새끼 코뿔소를 코끼리들이 거두는 모습, 출신을 알 수 없는 알을 펭귄 치쿠가 품는 모습, 코뿔소 노든이 새끼 펭귄 ‘나’를 지키는 모습 등. 차이를 의식하지 않는 동물들의 이야기는 항상 남과의 다름을 생각하는 우리에게 생각거리를 준다.

『긴긴밤』
루리 글‧그림 | 문학동네 펴냄 | 144쪽 | 11,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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