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벤’(요런 셀데슬라흐츠)은 시각장애인 청년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앞을 보지 못하는 아들을 위해 책 읽어주는 사람을 여러 차례 고용하지만, 루벤의 난폭한 객기로 인해서 다들 오래가지 못하고 그만두게 됩니다. 그런 와중에 ‘마리’(핼리너 레인)라는 여인이 새로운 낭독자로 오게 되고,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는 그녀는 난동부리는 루벤을 첫 만남에서 강하게 제압해요. 루벤은 마리의 단호한 행동에 묘한 끌림과 호기심을 느끼게 되지요.
마리가 루벤에게 읽어주는 책은 안데르센의 동화 『눈의 여왕』입니다. 이 동화는 악마 트롤의 거울 조각에 눈과 심장이 찔려버린 소년 ‘카이’와 그의 단짝 친구인 소녀 ‘게르다’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요. 트롤의 거울은 무엇이든 실제보다 더 흉측하게 보이도록 하고, 사람의 마음을 차갑게 만드는 악마의 거울입니다. 이로 인해 카이는 저주에 걸려 게르다를 멀리하고, 차가운 얼음성에 갇히게 되지요. 하지만 게르다의 진심어린 눈물이 카이의 눈과 심장에 박힌 거울 조각을 녹이고, 마침내 두 사람은 힘을 합쳐 얼음성을 탈출합니다.
타마르 반 덴 도프 감독의 <블라인드>는 『눈의 여왕』과 교차하고 충돌하는 구조를 보입니다. 캐릭터로 말하자면, 루벤은 ‘저주에 걸린 카이’이며, 마리는 ‘카이를 구원하는 게르다’이지요.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캐릭터 구도가 영화 중반부에서 전복된다는 점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마리의 ‘흉터’ 때문이에요. 그녀는 어린 시절 부모에게 학대를 당해 얼굴과 온몸에 흉터가 있는 여성입니다. 그래서 늘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세상과 거리를 두며 살아가지요.
마리는 눈 수술을 앞둔 루벤이 자신의 흉측한 모습을 볼까 두려워 미리 그의 곁을 떠나 버립니다. 수술에 성공한 루벤은 눈을 뜨자마자, 마리를 찾기 위한 여정의 길에 오르지요. 이 지점부터 영화는 동화의 캐릭터 구도를 뒤집는데, 루벤은 ‘카이를 구원하는 게르다’로, 마리는 ‘저주에 걸린 카이’로 전복됩니다. 실제로 마리는 깨진 거울에 의해 흉터를 입고 그 트라우마에 갇혀 살아가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마리는 트롤의 거울 조각에 눈과 마음이 멀어버린 카이와 존재론적으로 조응하는 관계입니다.
<블라인드>는 ‘본다’라는 근본적인 의미와 감각이 중요한 영화입니다. 영화는 그것을 ‘거울’이라는 이차프레임을 통해 다각도로 형상화합니다. 거울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 것 같지만, 항상 대상의 좌우측을 뒤집어 놓기 때문에 늘 실체를 왜곡하는 도구예요. 카메라는 거울에 반사된 인물들을 강박적으로 비추는데, 이는 편견에 속박된 인간의 시선을 고발하고 들춰내는 이미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거울(편견)에 의해 좌우가 뒤집어진 이미지와 다름없다는 것이죠.
영화에서 거울은 창문, 커튼, 빙판, 빗물 등의 이차프레임들로 끊임없이 반복 및 변주됩니다. 이러한 이차프레임들은 기본적으로 외부로부터 내부에 있는 것들을 은폐하는 기능을 수행합니다. 다시 말해, 사물의 본질을 비틀고 흐트러뜨리는 도구들이죠. 그것은 주지하다시피 인간의 눈도 마찬가지예요. 루벤이 마리의 진심을 보고, 그녀와 진실한 교감을 나눌 수 있었던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그가 아무것도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리가 눈 수술을 앞둔 루벤을 떠나기 직전에, 두 사람은 하얗고 투명한 커튼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애틋하게 감싸며 다독거립니다. 이 순간 마리는 루벤과 ‘동일한 상태’, 그러니까 커튼으로 인해 루벤을 볼 수 없는 상황에 놓입니다. 여기서 커튼은 ‘본질의 왜곡’이 아닌 ‘본질의 직시’를 가능케 하는 이차프레임으로 전도됩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눈이 아닌 마음을 여는 행위라는 것을 영화적으로 구현한 이미지라고 할 수 있지요.
루벤은 마리를 보면서, 마리는 루벤을 보면서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타진합니다. 근데 참으로 아이러니하지요. 내 존재의 당위성을 타인의 이미지를 통해 획득한다는 것 말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인간이 자신을 스스로 볼 수 없는 태생적 한계와 맞물려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볼 수 있는 것은 언제나, 항상 타인입니다. 이는 사랑의 속성과도 맥이 닿아있습니다.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어느 사람도 믿지 못하는 이들이 서로에게 사랑을 느낄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의 존재를 응시할 수 있도록 각자가 서로의 얼굴이 되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2017)에서 가장 로맨틱한 순간은 사랑을 나누는 두 주인공이 상대를 자신의 이름으로 부르는 장면에 있습니다. 이때 카메라는 두 사람의 육체를 역앵글 쇼트로 바라봅니다. 즉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 ‘나를 너의 이름으로 부르는 영화’라면, <블라인드> ‘나를 너의 얼굴로 보는 영화’입니다. 영화는 이렇게 묻는 것 같습니다. ‘당신은 누구를 통해 당신을 보나요?’ 자, 어떠신가요. 독자 여러분들은 영화가 던지는 물음에 자신 있게 답할 수 있으신가요?
[독서신문 송석주 기자]
참고문헌
허윤진, 한국여성문학학회, 거울들-동화 「눈의 여왕」과 영화 「Blind」의주제학적 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