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 명문장] 익명으로 기부하는 이유 『굿머니』
[책 속 명문장] 익명으로 기부하는 이유 『굿머니』
  • 김승일 기자
  • 승인 2021.01.09 14: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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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은 몇 개의 문장만으로도 큰 감동을 선사하고 알찬 정보를 제공합니다. ‘책 속 명문장’ 코너는 그러한 문장들을 위해 마련한 공간입니다.  

[독서신문 김승일 기자] 선한 목적으로 기부하면서 익명으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 

2007년 11월,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에 있는 이리(Erie) 시에 엄청난 익명 기부자가 나타났다. 작은 도시 안에 있는 46개 자선단체에 1억 달러를 기탁한 것이다. 한국 돈으로 1,000억원이 넘는 거액이다. (중략) 

35년 동안 약 9조원을 익명으로 기부한 ‘행복한 거지’ 찰스 F 피니의 이야기도 유명하다. 그는 살아생전 전 재산을 기부하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피니는 공항면세점 체인 사업으로 큰 부자가 됐다. 1982년부터 시작된 그의 익명 기부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우연한 사건 때문이었다. (중략)

익명 기부자가 미국에만 있을까? 한국에도 많다. 전주 노송동에는 매년 연말이면 ‘얼굴 없는 천사’가 A4 종이를 담는 박스에 거액을 놓고 간다. 이 얼굴 없는 천사는 2000년 4월 ‘어려운 이웃을 위해 써 달라’며 58만 4,000원을 노송동 주민센터 인근에 놓고 갔고, 그것을 시작으로 매년 수천만원에서 1억원 상당을 기부해왔다. 19년 동안 기부금 6억834만660원을 놓고 사라졌다. 공동모금회에서는 이 기부금으로 지역사회 어려운 가정의 아동청소년을 지원해 왔다. (중략) 

텔런트 문근영 씨의 익명 기부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내 이름이 많이 거론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십수 년 전의 일이지만, 그때는 정말 기자들에게 욕을 많이 먹었다. 어째서 모금회가 익명 기부의 뜻을 끝까지 지켜주지 못했느냐는 비난이었다. (중략)

공개되고 나서야 왜 기부 사실을 숨기려고 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됐다. 문근영 씨가 원하는 것은 그저 기부를 통한 선한 영향력 그 자체였다. 하지만 언론과 대중은 그 진정성의 뒷면을 끝까지 파헤치고 싶어했다. 질투와 시기심을 표현하는 네티즌도 있었다. 진정성을 의심하는 댓글도 생겼다. 하지만 달의 뒷면에는 달이 있다. 진정성의 뒷면에도 진정성이 있을 뿐이다. (중략) 

익명 기부를 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타인의 시선 때문이다. 가족이나 친척들이 혈연을 먼저 도와주지 않고 일면식도 없는 남을 도와주느냐고 해서 익명 기부를 선택하기도 한다. 대기업 임원 중에도 익명 기부자가 많다. 고액 연봉자들은 세금을 많이 내기 때문에 사실 기부하는 게 더 나은 재테크 방법일 수도 있겠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것을 ‘기부 테크’라 부른다. 기부자가 무엇인가 편익을 얻으면 사람들은 기부의 순수성을 의심하지만, 또 인기스타와 부자와 정치인들이 기부로 이미지가 좋아지면 순수한 기부가 아니라지만, 사실 모금 현장에는 그런 순수한 기부가 차지하는 비율이 매우 적다. 순수하든 순수하지 않든, 익명이든 익명이 아니든, 기부가 우리 사회를 선하게 만들어준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해본다. 익명 기부는 익명 기부대로 의미가 있고, 당당하게 이름을 밝히는 것대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문화, 그런 문화가 더 성숙한 게 아닐까.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른다는 것은 신체 기능에 무슨 문제가 있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다. 그만큼 모르게 하라는 소리지만,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아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굿머니』
김효진 지음│김보영 펴냄│260쪽│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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