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형의 불꽃
무형의 불꽃
  • 김혜식 수필가/前 청주드림 작은도서관장
  • 승인 2020.11.12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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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신문] 따사롭던 햇볕이 점점 옅어진다. 뜬금없이 햇살이 그립다. 볕 바라기를 할 양으로 집 앞 호숫가를 거닐었다. 늦가을에 내린 무서리 탓이련가. 지난 가을날 화려했던 꽃 향연이 끝난 수변(水邊) 근처는 겨울을 재촉하는 삭풍으로 말미암아 을씨년스럽다. 호숫가에 조성된 꽃밭에서 가으내 고운 자태를 뽐내며 흐드러지게 피었던 코스모스, 국화다. 그러나 이즈막 본색을 잃은 채 메마른 꽃 대궁만 스산한 초겨울 바람에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을 뿐이다. 

이 때 저만치 호숫가 주변에서 허리를 굽혀 부지런히 무엇인가를 하는 어느 여인의 몸짓이 보인다. 걸음을 재촉해 가까이 다가갔다. 초로의 여인이다. 어설픈 행동에 그녀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봤다. 앞이 안 보이는 듯 호숫가 주변에 즐비하게 서 있는 메마른 꽃 대궁들을 손으로 더듬는다. 곁에서 보다 못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아주머니! 제가 도와 드릴까요?” 그러자 여인은 입가에 웃음을 띠며 꽃씨를 훑는 중이라고 말한다. 그녀를 돕기 위해 꽃 대궁에 손을 대었다. 그러자 이내 대궁이 바스라지곤 한다. 그런 꽃 대궁이련만 바짝 메마른 씨방 속에 꽃씨만큼은 오롯이 박혀 있다. 한 톨이라도 땅에 떨어질세라 조심스레 꽃씨를 받아 그녀에게 건넸다. 그녀는 이번에도 고마움의 표시인 듯 얼굴 가득 밝은 웃음을 띤다.

그녀의 환해진 모습에 나도 모르게 홀렸다. 해 꽃씨를 따는 연유를 묻자 그녀는 지난 가을 내년 봄을 위해 시간만 나면 동네 곳곳을 다니며 꽃씨를 받았다고 했다. 그녀 말에 “돈 몇 푼만 주면 꽃씨를 살 수 있잖느냐?”라고 물었다. 그 물음에 그녀는 그동안 꽃밭에서 꽃씨를 얻을 때마다 자신의 심연 깊이 재생(再生)에 대한 강한 욕구가 절로 일어 행복했노라고 말한다. 그녀는 암흑 속에서 헤매는 자신의 가슴에 활활 타오를 희망의 불꽃을 발화(發火)시키기 위해 몇 해 전부터 꽃씨를 받는다고 했다. 

또한 자신이 꽃씨를 따는 이유는 꽃씨들이 품고 있는 생명의 도약 때문이라고도 했다. 꽃들은 마냥 아름답기만 한 게 아니라고 한다. 꽃잎 속마다 지닌 뜨거운 숨결을 자신은 마음의 눈으로 보고 느낄 수 있다고 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의 꽃들이지만 씨방 속에 갇힌 꽃씨를 손으로 만지노라면 그것에서 온기마저 전해진다고 했다. 해서 평소 꽃씨를 손바닥에 놓고 매만지길 즐긴단다. 그 때마다 자신의 건조한 가슴이 어느덧 생에 대한 열망으로 따스하게 덥혀지고 윤기가 흐르는 듯한 착각이 든단다.

그녀의 나지막하면서도 부드러운 음성으로 들려주는 꽃씨에 대한 이야기를 듣노라니, 나 역시 코로나19로 인한 피로감과 우울증이 치유되는 기분이다. 한편 갑자기 가슴에 손이 얹어지기도 했다. 그동안 수없이 호숫가를 거닐면서도 그곳 주변에 피어난 꽃들이 전해주는 무언의 자연음엔 전혀 귀 기울이지 못했다는 자책 때문이었다. 

그녀는 하얀 무명천에 빨간 수 실로 맨드라미 꽃 두 송이가 앙증맞게 수놓인 작은 천주머니를 가방에서 꺼낸다. 그리곤 이곳에서 딴 꽃씨를 소중한 듯 그 속에 넣는다. 

꽃씨를 갈무리한 그녀가 마치 오래된 지인처럼 내 앞에서 자신에 대한 이야기 보따리를 스스럼없이 풀어헤쳤다. 그녀는 올해 나이 오십 대 중반으로서 사 년 전 실명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한 발 한 발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광명을 겸허한 마음으로 맞이하고 있다고 했다. 자신의 눈을 개안할 수 있는 수술 날짜를 기다리는 게 그것이란다.

젊어서는 빈손인 남편을 만나 과일 행상, 파출부등을 하며 가난을 극복했단다. 어느 정도 생활이 안정되자 남편은 노름판에 미쳐서 매일이다시피 술을 마시고, 노름으로 전 재산을 탕진했다고 한다. 이도 모자라 걸핏하면 가족들에게 행패까지 부렸단다. 참다못한 여인은 십 수 년 전, 고심 끝에 남편을 강제로 정신병원에 입원을 시켰단다. 그러나 그곳서 탈출한 남편은 자신을 정신병원에 감금한 것에 앙심을 품고 그녀에게 이혼을 요구하더란다. 

남편과 이혼 후 파출부, 공장 일을 하며 억척스레 자식들을 키웠다고 했다. 남매 모두 대학 공부까지 시켰단다. 그러던 그녀가 지난 세월 모진 고생을 한 탓인지 이름 모를 병이 발병해 암흑 속에 지내게 됐다는 것이다.

그녀는 다시금 무명 천 주머니를 열어 꽃 씨 한 톨을 꺼내어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채 말을 이었다. 꽃씨는 지난날 하루하루 새싹을 틔울 꿈을 꾸며 영글었을 거라고 했다. 한 톨의 꽃 씨 속엔 새싹을 발아(發芽) 시킬 간절한 소망이 고스란히 깃들어 있다고 했다. 자신도 그런 꽃씨를 가슴에 한껏 품고 있단다. 그래서인지 얼마 전부터 깜깜했던 눈앞이 희부옇게나마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며 또 함박웃음을 웃는다. 순간 그녀의 웃음이 모나리자의 미소보다 더 아름답게 내 눈에 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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