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신문 서믿음 기자] 과거 2017년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는 다니는 곳마다 “원칙과 상식을 지키면 잘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유세해 큰 호응을 얻었고 결국 대통령에 올랐다. 원칙주의자로 잘 알려진 이낙연 의원은 꼼수를 용인하지 않는 올곧은 성정을 높이 평가받았고 결국 더불어민주당(민주당) 당 대표에 올랐다. 그 어느 때보다 ‘원칙’이 존중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됐는데, 역설적으로 민주당에서 원칙이 훼손되는 사태가 벌어져 논란이 일고 있다.
논란은 서울·부산 보궐 선거를 둘러싸고 민주당이 당헌을 개정한 데서 비롯됐다. 지난 2015년 당시 민주당 대표였던 문 대통령이 ‘정치 혁신’을 위해 마련한 당헌 96조 2항(“민주당 소속 공직자의 중대한 잘못으로 재보궐 선거가 치러질 경우 후보를 추천하지 않는다”)에 따르면 전임자가 성추문에 휩싸인 가운데 사퇴·사망해 재보궐 선거(내년 4월 7일)가 치러지는 서울·부산에 민주당 후보를 낼 수 없었는데, 후보를 내기 위해 당헌을 수정했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지난 3일 중앙위원회를 열고 “전당원 투표를 통해 (후보 추천을) 달리 정할 수 있다”는 조항을 추가해 후보 공천을 위한 당헌 개정을 마무리했다.
정치인과 정당의 말 바꾸기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당의 헌법이라 할 수 있는 당헌(원칙)에 필요(입후보)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필요를 당헌에 반영하는 상황은 원칙과 상식에 부합하지 않는 이례적인 조처로 비쳤다. 이와 관련해 이낙연 대표는 지난 2일과 4일 열린 최고위원회 자리에서 “(성추행 피해자분들께) 거듭 사과드린다. 서울·부산 시민을 비롯한 국민 여러분께도 다시 한번 사과드린다”며 “(민주당) 후보자를 통해 시민에게 보여드릴 정책과 비전을 잘 판단하고 심판하실 것을 부탁드린다”고 전했다. 하지만 그간 중요 사안에 입장을 밝혀왔던 문재인 대통령은 당헌 개정과 관련해 별다른 의견을 전하지 않았다.
그런 민주당과 문 대통령을 향한 여론은 좋지 않았다. 여론조사(한국갤럽이 지난 3~5일 18세 이상 1,002명에게 설문)에 따르면 ‘민주당의 후보 추천’에 관해 서울 지역 응답자의 43%, 부산·울산·경남 지역 응답자의 42%가 “잘못된 일”이라고 평가했다. 긍정 평가는 각각 29%, 35%였다. 특히 중도층의 경우에도 “잘못한 일”(51%)이란 의견이 “잘한 일”(30%)을 크게 웃돌았고, 무당층의 경우 “잘못한 일”(42%)의 비중이 “잘한 일”(17%)을 압도했다. 문 대통령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평가자의 45%도 “잘못된 일”로 규정했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5일에는 국회 법사위 예산심사 전체 회의에 참석한 이정옥 여성가족부 장관이 ‘서울·부산시장 보궐 선거에 838억원이 소요된다는 점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국민이 성인지성에 대한 집단 학습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해 논란을 더했다. 전 부산시장 성추행 피해자는 “(성추행 사건이) 집단 학습 기회면 나는 학습 교재냐”라며 반발했다.
사실 권력 추구는 정당의 본능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강원택 서울대 교수는 책 『한국 정치의 결정적 순간들』에서 “민주주의 체제에서 정당은 선거에 후보자를 내세워 공직을 차지함으로써 권력을 얻으려는 사람들의 집단”이라며 “종종 정당을 두고 ‘권력에만 눈이 어두워서’라고 지적하지만, 권력에 눈이 어두운 곳이 바로 정당이다. 권력을 추구하는, 즉 선거에서 공직을 얻음으로써 통치기구를 통제하려는 사람들의 모임이 곧 정당인 것”이라고 말했다. 그간 숱한 정치인과 정당이 가지각색의 잘못을 저질렀고, 그 잘못은 선거로 심판받았다. 과거 박근혜 전 대통령 파면 이후 치러진 대선에서 자유한국당(‘국민의 힘’ 전신)이 후보를 냈다는 점에서 내년 보궐 선거에서 민주당이 후보를 추천하는 행위 자체를 비난하기는 어렵다. 민주당의 주장처럼 선거로 심판받으면 될 문제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번에 문제가 되는 건 ‘정치 개혁’을 주장하며 당헌으로까지 못 박았던 사안을 필요에 의해 자의적으로 개정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신뢰의 문제로, 앞으로도 유사 상황에서 얼마든지 원칙을 수정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해 문제점으로 지적받는다.
철학자 톰 필립스는 책 『진실의 흑역사』에서 “나랏일을 하는 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안 하는 게 정말 엄청난 차이가 있다. 일단, 누구나 마주치는 ‘정직이냐 거짓말이냐’라는 선택의 갈림길에서, 정치인은 정직을 택했을 때 손해를 볼 만한 요인이 (일반인보다) 훨씬 많다”고 말한다. 6대 광역시 중 2개 광역시의 후보 추천을 포기하는 건 정당으로서 큰 손실이다. 다만 그런 이유로 원칙을 저버리는 행위에, 또 그 원칙을 만든 문 대통령의 침묵에 많은 사람이 아쉬움을 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