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 명문장] 빛은 태양 속에서 100만년을 기다린다 『빛의 핵심』
[책 속 명문장] 빛은 태양 속에서 100만년을 기다린다 『빛의 핵심』
  • 전진호 기자
  • 승인 2020.11.04 09: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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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은 몇 개의 문장만으로도 큰 감동을 선사하고 알찬 정보를 제공합니다. ‘책 속 명문장’ 코너는 그러한 문장들을 위해 마련한 공간입니다.  

[독서신문 전진호 기자] 물리학자들은 저를 빛알 혹은 광자(photon)라고 부릅니다. 빛을 파도처럼 넘실대는 파동이라 생각하시겠지만, 그 빛의 에너지는 우리 빛알들이 아주 작은 덩어리 단위로 나릅니다. 햇빛을 이루는 빛알은 엄청난 압력과 온도로 인해 핵융합이 일어나는 태양의 중심부에서 태어납니다. 고밀도 플라스마 속의 하전 입자들과 끊임없이 충돌하며 수십만 년의 시간을 갈짓자로 올라와 태양 표면에 간신히 닿은 저는 지구를 향해 떠날 준비가 끝났습니다. 

얼마 전 태양의 표면에서 출발해 지구로 떠난 빛알들이 약 8분의 시간을 날아 도착한 곳은 달의 표면이었습니다. 공교롭게도 달이 태양과 지구 사이를 가로막아 지구에 가닿을 운명이 바뀐 것이죠. 덕분에 지구 곳곳에서 개기일식의 장관이 펼쳐졌습니다. 눈부신 태양을 달이 완전히 감싼 2분의 시간, 어둠에 잠긴 고요한 대지 위로 검은 달을 휘감아 황홀하게 타올랐던 태양의 코로나는 인생의 찰나와 우주의 영겁이 조우한 장면이 아니었을까요? 

달 표면에서 반사된 빛알 일부는 혜성의 고향인 오르트 구름을 뚫고 250만 년을 더 날아가 안드로메다은하에 가 닿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어디로 가고 싶냐고요? 물론 대적점의 소용돌이를 과시하는 목성도, 얇은 띠를 허리에 두르고 한껏 뽐내는 토성도 매혹적인데다가 거대한 간헐천이 솟구치는 엔켈라두스 위성이나 탄화수소의 액체 바다가 넘실대는 타이탄의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장 가고 싶은 곳은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지구입니다. 지구는 생명이 넘쳐나는 곳입니다. 수십억 년 전 빛 알갱이들이 끝없이 실어 나르는 에너지를 머금고 탄생한 생명의 씨앗이 지구상 모든 곳으로 뻗어나가 생동하는 기운을 퍼뜨립니다. 그토록 찬란한 생명의 안식처인 지구를 향한 빛알들의 여행은 끊임없이 계속됩니다. 비록 급증하는 온실 기체가 지구를 금성의 운명을 향해 위태롭게 몰아붙여도, 혹은 인간과의 공존을 힘겹게 버틴 종들이 사라져 결국 지구가 인간과 가축, 작물들만의 세상이 돼 파멸의 길을 갈지라도 지구를 향한 우리의 여행은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저는 태양 속에서 100만 년을 버틴 끝에 지구를 향한 8분의 여행을 시작합니다. 저는 이 짧은 여행의 종착지를 모릅니다. 어쩌면 거대한 구름을 만나 산란하며 푸른 바다 속으로 들어가거나 소나기가 내린 후 태어난 물방울들을 만나 반사되고 굴절되며 무지갯빛 편린으로 사라지겠지요. 그렇지만 제가 소멸하는 그 순간이 바로 차가운 우주 공간을 날아온 빛알의 에너지가 지구와 그 속의 생명과 만나는 운명의 마지막 순간이라는 것을 기억해 주세요. 여러분이 목격하는 그 장면 하나하나가 바로 우주와의 조우라는 점을 마음에 담아 주세요. 그것만으로도 제 8분간의 여행은 충분히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7~9쪽>

『빛의 핵심』
고재현 지음│사이언스북스 펴냄│400쪽│2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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