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신문 서믿음 기자] 대전 유성구의 한 서점 서가에 ‘왜구소설’(일본소설)이란 팻말이 붙었다. 왜구는 13∼16세기 우리나라 연안에서 약탈을 일삼던 일본 해적을 일컫는 말로, 최근 들어서는 일본인을 낮잡아 이르는 비하 용어로 사용됐기에 적잖은 논란이 일고 있다.
논란은 지난 21일 페이스북 등의 SNS를 통해 ‘왜구소설’ 팻말을 붙인 서가 사진이 공유되면서 시작됐다. ‘합성’이란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오래지 않아 사진은 ‘진짜’로 확인됐는데, 20년째 해당 서점을 운영하는 A씨는 “일본의 많은 서점은 오래전부터 혐한 서가(한국을 혐오하는 내용의 책 비치)를 운영하고 있다”며 “지난해 아베 전 총리가 (수출 제한 등 한국을 향해) 경제 보복을 하는 것을 보고 의사표현 차원에서 명판을 바꿨다”고 전했다. 현재 왜구소설 서가에는 무라카미 하루키, 요시모토 바나나, 히가시노 게이고 등 저명한 일본 작가의 소설이 비치됐다.
온라인에서 의견이 갈렸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맞대응한 모습에 일부 누리꾼은 지지를 표명했고, 다른 한쪽에선 혐한에 혐일로 대응하는 건 현명한 처사가 아니라는 반대 의견을 밝혔다. 또한 ‘혐한’은 (비록 바람직하지 않을지언정) 특정 사회 현상을 지칭하는 말로 참작될 수 있지만, 단어 자체에 비하의 의미가 담긴 왜구는 부적절하다는 의견도 눈에 띄었다. 다만 ‘부족 본능’에 기인한 지지가 반대보다 상대적으로 많았다.
부족 본능은 특정 집단에 소속되기 원하는 인간의 본성을 뜻하는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내집단을 향한 소속감이 강할수록 외집단을 향한 배타적 감정이 강하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해 에이미 추아는 책 『정치적 부족주의』에서 “인간에게는 부족 본능이 있다, 우리는 집단에 속해야 한다. 우리는 유대감과 애착을 갈구한다. 하지만 부족 본능은 소속 본능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부족 본능은 (곧) 배제 본능”이라며 “어느 집단이건 일단 속하고 나면 우리의 정체성은 희한하게도 그 집단에 단단하게 고착된다. 가령 개인적으로는 얻는 것이 없다고 해도 내가 속한 집단 사람들의 이득을 위해 맹렬하게 나서고, 별다른 근거가 없는데도 외부인에게 징벌적인 위해를 가하려 한다”고 설명했다. 혐한 서적은 한국을 혐오 대상으로 간주하지만, 그건 일부 혐한 인사들의 주장일뿐, 일본 국민 절대다수의 의견을 대변하지 않으며 실제로 한국이 혐오적 존재인 것도 아니다. 반대로 혐일 역시 일부의 의견일 뿐이며 유명 일본 작가들이 ‘왜구’인 것도 아니다.
또 일본 내 서점에 혐한 서적이 많이 비치된 것은 사실이지만, 개별 서점 차원에서 나름의 자정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 내 서점 현황을 담은 『나는 서점을 좋아했습니다』의 저자인 재일 동포 나가에 아키라는 “일본 내 대다수 서점은 출판사나 유통사로부터 납품받을 책을 선택할 수 없고 보내오는 대로 비치해야 하기 때문에 사실상 혐한 서적을 걸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며 “그럼에도 일부 서점은 혐한 서적을 거부하거나, (비록 효과가 크지 않더라도) 혐한 서적 옆에 혐한 서적을 비판하는 책을 함께 비치해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한다”는 취지의 말을 전했다.
지식의 전당인 서점에선 중립적 가치가 지켜질 필요가 있고, 표현의 자유 이상으로 윤리적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혐오에 혐오로 대응한다면, 머잖아 일본 내 서점에 ‘조센징(한국인을 낮잡아 부르는 말) 소설’이 등장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왜구 지칭의 쾌감은 잠깐이지만, 그 수습에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할 수 있다. ‘너 나빠’ 그러니 ‘나도 나쁠 거야’는 결국 ‘우리 모두 다 나빠’일 뿐이다. 왜구란 호칭에선 혐한 세력의 언향(言香)이 강하게 풍겨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