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 명문장] 최영미 시인 “나는 언어에 민감한 동물”
[책 속 명문장] 최영미 시인 “나는 언어에 민감한 동물”
  • 전진호 기자
  • 승인 2020.10.22 16: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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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신문 전진호 기자] 어째서 생판 남인 남자들이 내게 ‘형’이 되냔 말이다. 나는 여자니까, 나보다 일찍 태어난 남자는 나의 형이 아니라 ‘오빠’가 맞다. 사전적인 정의에도 맞지 않는 야만적인 관계를 내게 강요하는 저들이 이해되지 않았다. 나는 남학생 위주로 돌아가는 대학문화에, 위계질서가 뚜렷한 운동권의 문화에 쉽게 적응할 수 없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언어에 아주 민감한 동물이다.

한국의 지식인들에게 공통된 원죄는 ‘나는 거기에 없었다’였다.

사랑. 사랑에 나는 약하다. 누가 내게 사랑이 묻은 사탕을 던지면 간이라도 빼준다. 몸도 주고 돈도 주고 집도 내준다. 뻣뻣하던 마음도 흐물흐물 풀린다. 사랑, 때문에 나는 다시 주저앉는다. 처음 내 몸에 ‘손’을 대고 그는 엉뚱한 논리로 자신을 합리화했다. 너무 사랑해서, 헤어지기 싫어서, 때릴 수밖에 없다.

사회주의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어. 인간은 선하지 않아. 사회주의의 기본 전제는 모두가 모두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욕망을 조절한다는 것인데... 인간의 이기심을 과소평가했지. 인간의 본성에 반反한 거라 실패할 수밖에 없었어. 사회주의가 인간의 욕망을 과소평가했다면, 자본주의는 상품을 팔기 위해서, 없는 욕망도 만들어내지.

80년대가 내게 남긴 것은 이념이 아니라 ‘정서’이다. 이념이나 사상은 변할 수 있지만, 정서는 변하지 않는다. 옷을 고르는 취향, 타인을 대하는 태도, 말버릇이나 헤어스타일은 한번 굳어지면 평생을 간다. 작은 것들에 대한 연민, 정의에 대한 갈증, 돈과 악수하지 않는 손, 권력에 굽실거리지 않는 허리를 그 시절은 내게 물려줬다.

 

『청동정원』
최영미 지음 | 이미 펴냄│324쪽│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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