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지도 허용도 어려운 낙태... 진짜 문제는 따로있다?
금지도 허용도 어려운 낙태... 진짜 문제는 따로있다?
  • 서믿음 기자
  • 승인 2020.10.12 08: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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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신문 서믿음 기자] “(어느 늙은 산파의 집) ‘넣는 동안만 잠깐 뜨거울 거예요.’ 끓는 물에서 꺼낸 잔뜩 오그라든 작고 붉은 막대기. ‘늘어나요. 보시면 알 거예요.’ 나는 수술대 위에 있었다. 다리 사이로 반백의 머리카락 그리고 핀셋 끝에서 흔들리는 붉은 뱀만이 보였다. 그것이 사라졌다. 끔찍했다. 나는 솜을 넣어 그것을 고정하는 늙은 여자에게 소리쳤다. 거기를 만져서는 안 돼. 네가 거기를 망가뜨릴 거야 (중략) 긁어내고, 망가뜨리고, 메우고, 나는 그곳을 다시 쓸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 아니 에르노 『빈 옷장』 中

프랑스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아니 에르노 작가는 소설 『빈 옷장』에서 자신이 20살 때 받았던 불법 낙태(임신중절) 수술의 기억을 위와 같이 묘사한다. 불법 시술이었기에 위생적이지 못했고, 전문 의료인이 아니기에 안전을 담보하기 어려웠는데, 이런 상황은 낙태 허용을 주장하는 측이 우려하는 주요 요인 중 하나다. 페미니즘 전문 출판사 봄알람이 펴낸 『유럽 낙태 여행』에서 이민경 공동저자는 “낙태는 불법이므로 대부분의 수술이 법의 보장 바깥에서 비밀리에 이뤄지고 (여성들은) 이에 따른 신체적 위험 부담과 금전적 부담, 죄의식을 떠안고 살아(간다)”고 말한다.

임신은 누군가에겐 축복받을 일이지만, 준비되지 않은 누군가에겐 당혹스러운 일이다. 누군가는 비싼 돈을 들여 시험관 시술을 받지만, 반대로 누군가는 상당한 돈을 들여 아이를 지운(낙태)다. 낙태 자체가 불법인지라 통계가 상이한데, 보건복지부는 국내 낙태 수술 건수를 2005년 34만2,000건, 2010년 16만8,000건, 2017년 4만9,764건으로 추정한 반면 대한산부인과의사회는 2005년 기준 하루 평균 3,000명이 낙태 수술을 받은 것으로 추정해 복지부가 밝힌 수치와 차이를 보였다. 다만 “낙태 수술 건수가 감소한 것은 의료현장에서도 체감할 수 있다”며 낙태 건수 감소에는 동일한 입장을 보였다. 낙태 수술 감소는 피임실천율 증가, 응급 피임약 처방 건수 증가, 만 15~44세 여성의 지속적 감소 등이 원인으로 지목됐다.

그럼에도 하루에 최소 130여명의 낙태 수술이 이뤄지는 걸로 추정되는데, 주요 원인은 무엇일까?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발표한 ‘2018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여성 1만명 대상)에 따르면 ▲학업, 직장 등 사회활동에 지장이 있을 것 같아서 ▲경제 여건상 양육이 힘들어서(고용불안정, 소득이 적어서 등) ▲자녀계획(자녀를 원치 않아서, 터울 조절 등)이 각각 33.4%, 32.9%, 31.2%로 높게 나타났다. 여성의 자기결정권 존중이 주요 이유로 지목된 건데, 그간 낙태는 강간이나 근친상간에 따른 인한 임신, 유전 질환이 있는 경우 등 극히 제한된 경우에만 허용됐기 때문에 위 사례는 모두 불법에 해당했다. 다만 실제 처벌(벌금 200만원 이하, 징역 2년 이하)로까지 이어진 경우는 극소수였는데, 대법원에 따르면 2017년 한 해에 기소된 사건은 14건이며 그중에서 처벌로 이어진 건 2건(징역 1, 벌금 1)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여성단체를 중심으로 낙태죄 폐지에 관한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는데, 결국 지난해 4월 낙태 처벌 조항이 담긴 형법 제 269조·제270조가 헌법불합치 판결을 받으면서 헌법재판소는 올해 안에 해당 법안을 수정할 것을 주문했다. 이에 지난 7일 법무부와 복지부는 관련 법률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는데, 개정안에 따르면 임신 14주(태아 키 10~12㎝, 몸무게 70~120g)까지는 자유로운 낙태가 가능하고, 성범죄나 친족간 임신, 산모 건강이 우려될 경우에는 24주까지 낙태가 가능하다. 또 가정불화나 경제적 이유로도 (상담 및 숙려 기간을 거친 후) 낙태가 가능하고, 기존에 부모 등 법적 보호자의 동의를 얻어야 낙태가 가능했던 미성년자도 상담을 거치면 낙태를 허용하는 내용이 법안에 담겼다. 다만 개정안에는 의사 반발도 고려해 의사가 신념에 따라 낙태 수술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도 포함했다.

낙태 가능 기한을 임신 12주로 제한하는 미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 등의 국가보다 완화된 기준이지만, 여성단체는 낙태 완전 허용을 주문하고 있고, 종교계를 비롯한 낙태 반대 단체는 태아의 생명권 존중을 이유로 반대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낙태 수술의 95%가 임신 12주 이내에 이뤄지는 현실을 고려할 때 사실상 전면 허용으로 볼 수 있는데, 이에 여성단체는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보장하기 위해선 전면 허용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반대 측은 ‘22주를 넘은 태아는 엄마의 몸을 떠나 독자생존이 가능한 인격체다. 그런 이유에서 낙태는 살인’이라는 입장을 내놓고 있다.

개정안에 낙태 찬반 측 모두 반발하는 모양새인데, 그런 와중 한편에선 낙태 허용 여부보다 낙태로 이어지는 환경 개선에 더욱 힘써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봉화 명지대 교수(전 보건복지가족부 차관)가 상임대표로 있는 낙태 반대를 주장하는 시민단체 ‘프로라이프’ 측은 낙태법 개정에 앞서 ▲익명 출산법 ▲남성 양육비 책임법 ▲싱글맘 지원법 등을 제정해 출산과 양육을 위한 복지 환경을 먼저 조성해야 한다고 요구하기도 했다.

오랜 기간 낙태를 금지한 루마니아에서 불법 낙태 시술에 의한 사망자가 매년 500명에 달하는 상황을 다룬 책 『아픔이 길이 되려면』에서 김승섭 고려대 교수는 “낙태를 규제한다고 해서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여성의 수가 줄어들 리 없습니다. 결국 법을 우회하는 길을 찾을 수밖에 없겠지요. 낙태 수술은 과거보다 더 높은 비용으로 은밀히 진행될 것이고, 많은 여성이 위험하기 그지없는 낙태 방법에 의존하게 되겠지요”라고 말했다. 이렇듯 제재만이 능사가 아닌 건 분명한 사실이지만, 의도치 않게 생겼다는 이유로 무고한 생명을 손쉽게 삭제하는 것도 답은 아니다. 영화 <24주>에서 주인공 아스트리드가 태중에 아이가 다운증후군이란 사실을 알고도 임신을 유지하다가 임신 24주 무렵 태아 심장에 문제가 있다는 통보를 받고 고민을 거듭한 끝에 낙태를 결정했듯, 제도적으론 손쉬워도 심적으론 결코 가볍지 않은 그런 낙태에 관한 고심이 필요한 시점이다. 해당 개정안은 40일간의 입법 예고 후 올해 안에 입법 여부가 결정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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