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석주의 영화롭게] ‘밤의 해변에서 혼자’로부터 ‘도망친 여자’의 이야기
[송석주의 영화롭게] ‘밤의 해변에서 혼자’로부터 ‘도망친 여자’의 이야기
  • 송석주 기자
  • 승인 2020.10.01 0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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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감독, 영화 <도망친 여자> 스틸컷

홍상수의 <도망친 여자>를 보고 극장을 나오면서 그의 전작 <밤의 해변에서 혼자>(2017)가 떠올랐다. 정확히 말하면, 영화를 보는 내내 <밤의 해변에서 혼자>의 ‘영희’(김민희)가 <도망친 여자>의 ‘감희’(김민희)로 성장했다는 실감이 강하게 밀려왔다. 유부남 감독과의 연애로 삶에 큰 파장을 겪은 영희가 제목처럼 밤의 해변에 혼자 놓인 쓸쓸한 상태를 보여주는 영화가 <밤의 해변에서 혼자>라면, <도망친 여자>는 영희(혹은 감희)가 그 쓸쓸한 상태를 극복하고 새로운 사랑을 만나 소소한 일상을 향유하는 영화이다.

독일 함부르크의 어느 공원에서 “내가 원하는 건 그냥 나답게 사는 거야. 흔들리지 않고 무슨 일이 일어나도 나답게 살고 싶어”라고 체념하듯 다짐했던 영희가 실제로 그런 삶을 사는 것을 홍상수는 <도망친 여자>의 감희를 통해 흥미롭게 형상화한다. 감희가 어느 극장에서 파도치는 해변을 바라보는 모습은 영희가 홀로 해변에 앉아 있는 모습과 묘하게 이어진다. 혹시 감희가 바라본 해변에 영희가 있었던 건 아닐까. 만약에 그렇다면 감희는 ‘영화’를 본 것이 아니라 ‘영희’(과거의 자신)를 본 것에 다름이 없다.

이제 감희는 영희처럼 누군가의 등에 업혀 가거나, 술에 취해 사람들에게 짜증을 피우거나, 사랑으로 인한 시련으로 고통스러워하지 않는다. 감희는 도망치지 않고, 세상과 적절한 거리를 두며,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걸어갈 줄 안다. 늘 배고파하는 것은 영희나 감희나 다를 게 없지만, 두 여자의 허기의 원천은 조금 다르다. 전자가 삶과 사랑의 근원적 회한에서 오는 존재론적 허기였다면, 후자는 일상을 건강하게 영위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물리적 허기일 뿐이다.

<도망친 여자>는 바로 일상의 허기를 슬기롭게 극복할 줄 아는 미덕을 지닌 영화이다. 영화는 남편의 긴 출장으로 인해 오랜만에 지인들을 만나러 다니는 감희의 일상을 에피소드 형식으로 나열한다. 감희는 남편과 이혼하고 빌라 하나를 얻어서 사는 ‘영순’(서영화)과 돈 많고 당찬 싱글 ‘수영’(송선미), 그리고 자신의 옛 연인과 결혼한 친구 ‘우진’(김새벽)을 만난다. 카메라는 감희의 두 번의 예정된 만남(영순, 수영)과 한 번의 우연한 만남(우진)을 롱 테이크로 껴안으며 삶의 다양성과 우연성을 보듬는다.

홍상수 감독, 영화 <도망친 여자> 스틸컷

<도망친 여자>에 등장하는 여자들은 영화의 제목과 달리 도망치지 않는다. 그들은 단단하게 세상(남자)과 맞선다. 고양이에게 밥을 주지 말라는 이웃집 남자의 억지에(영순), 자신을 제발 좀 만나 달라고 떼쓰는 남자의 무례함에(수영), 한때 연인이었지만 지금은 친구의 남편이 된 남자의 위선에(감희), 여자들은 견고하고 단호한 자세로 대응한다. 우진 역시 유명해진 남편이 TV에 나와 허황된 이야기를 지루하게 반복하는 것에 관해 “바보짓 같아”라고 일갈하며 자신의 속내를 감희에게 숨김없이 드러낸다.

말하자면 <도망친 여자>는 어떤 상황이나 압력에도 쉽게 자신의 태도를 굽히거나 회피하지 않는 단단한 여자들의 생기로 넘쳐나는 영화이다. 이에 반해 영화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남자는 얼굴이 없다. 그러니까 카메라가 남자들의 얼굴을 자세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남자들은 대부분 카메라를 등지고 서 있거나, 카메라를 등지고 걸어간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할 때, 남자들은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떠난다. 하지만 이 영화의 여자들은 그러지 않는다. 자신의 삶에 더없이 솔직하고 당당하다.

제70회 베를린 영화제에서 클레버 감독은 <도망친 여자>에 관해 “맛있는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며, 친구와 인생을 나눈다. 영화를 보고, 고양이를 자식처럼 다룬다. 마치 그게 전부인 것처럼”이라고 말했다. 홍상수는 마치 그게 전부인 것처럼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관객 역시 스크린을 향해 어떤 질문을 던지고 싶어진다. 중요한 것은 영화든 관객이든 서로에게 ‘답’이 아닌 ‘질문’을 던진다는 것이다. 영화와 관객이 서로에게 던진 질문이 맞부딪칠 때, 실재(實在)와 재현의 경계는 무너진다. 홍상수의 유니버스는 그렇게 현실과 하나가 된다.

홍상수 감독, 영화 <밤의 해변에서 혼자> 스틸컷

다시 앞으로 돌아가 보자.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서 홍상수는 강릉의 어느 극장에서 홀로 영화를 보고 있는 영희의 모습을 오랫동안 포착한다. 이때 관객은 영희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이제 홍상수는 <도망친 여자>에서 그 ‘무엇’이 파도치는 해변이었음을 보여준다. 파도의 물성(物性)은 힘차게 밀려왔다가 서서히 멀어져가는 데 있다. 생(生)의 본질과 관계의 역학 또한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삶과 죽음 혹은 만남과 헤어짐의 자장 안에서 부단히 호흡한다. 해변의 파도처럼. 영희(혹은 감희)는 이제 그 간명한 이치를 안다.

[독서신문 송석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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