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 명문장] 순정만화를 무시하지 마세요 『안녕, 나의 순정』
[책 속 명문장] 순정만화를 무시하지 마세요 『안녕, 나의 순정』
  • 전진호 기자
  • 승인 2020.09.30 18:5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독서신문 전진호 기자] 몇 년 전 한 포털사이트에서 ‘한국만화거장전: 순정만화 특집’이 연재되고 있을 때, 누군가 이런 댓글을 달았다. 
“순정만화도 거장(?)이 있군요ㅎㅎ”

악의 없이 던진 말일지 모른다. 하지만 (나를 비롯해) 분노한 순정만화 팬들의 반박이 이어졌다. 순정만화를 잘 모르면서 그렇게 얕잡아 비아냥 거리지 말라. 얼마나 많은 거장이 있는지 알고 있느냐 등등. 나 역시 이렇게 썼다(가 지웠다).
“제발 좀 읽고 와서 이야기합시다. 우리.” 

이 책은 저 댓글에 대한 반론으로 시작된 것일 수도 있겠다. 어쩌면 한 시절 나를 가득 채웠던 ‘거장’들의 그 이야기가 나에게, 우리에게 진짜 무슨 의미였나, 돌아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순정만화만큼 오해를 많이 받은 장르도 드물다. ‘펄럭이는 드레스 입은 공주님들이 나오는 유치한 만화’라거나 ‘남자 때문에 질질 짜는 여자들 이야기’라거나, 특정한 이미지를 뒤집어씌워 가치를 낮추려는 움직임이 길고도 집요하게 이어졌다. 우리는 안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특히 1980~1990년대 우리 앞에 도착했던 그 엄청난 작품들은 그때까지 어느 장르에서도 찾아보기 힘들었던 독창성이 넘쳤고, 고정관념을 뒤엎는 세계관이 깃들어 있었다. 

순정만화 속에서 여자들은 자유로웠다. 원하는 남자를 열망하고, 목숨 걸고 사랑하고, 우주로 가고, 혁명을 하고, 왕이 됐다. 다시 읽어보면 거슬리는 구시대 정서의 표현도 물론 있지만, 만화 밖 세상의 부조리함과 비교하면 사소한 수준이었다. ‘여자니까 하지 말라’는 말을 집에서 학교에서 지겹도록 들은 우리에게 순정만화는 ‘여자니까 해도 된다’고 말해줬다. (중략)

‘순정 : 순수한 감정이나 애정’
순정만화라는 명칭을 두고 논란이 있단 것을 안다. 이 단어가 주는 고루한 느낌을 버리고 여성만화나 감성만화 등으로 바꿔 부르자는 목소리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나는 순정만화라는 말이 좋다. ‘순정만화’가 아니고서는 떠올릴 수 없는 특별한 정서와 감정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순정을 순정이라 부르기로 한다. 그리고 이제 그 순정을 다시 꺼내어볼 참이다. 그 기억들이 어떤 모양이든 나는 퍽 반가울 것 같다. 안녕, 나의 순정. <4~7쪽>

『안녕, 나의 순정』
이영희 지음│놀 펴냄│256쪽│16,000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비회원 글쓰기 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