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미레의 육아에세이] 여름 후에, 복숭아 
[스미레의 육아에세이] 여름 후에, 복숭아 
  • 스미레
  • 승인 2020.09.28 16: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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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만 되면 기운을 잃고 풀이 죽는 아이, 바로 나였다. 여름날 아침이면 잠에서 깨기 전부터 길고 지루한 하루를 보내야 한다는 막막함에 진저리가 났다. 종일 물먹은 솜 꼴인 데다 입까지 짧아져서는 식탁 위에 무엇이 올라도 시큰둥했다. 끼니마다 터져나오는 엄마의 한숨은 모르는 척 숟가락을 놓고 일어나기가 일쑤였다.
그러다 복숭아만 보면 눈이 빛났다. 아빠가 이따금 복숭아를 상자째 사 오시던 이유는 아마 그 때문이었을 테다. 슈퍼마켓 복숭아는 영 마땅치가 않다며 제법 먼 도시의 농원까지 달려가 사온 놈이니 어서 먹어보라시던 아빠의 목소리는 어쩐지 상기되어 있었다. 
아직 방학이 반도 더 남아있던 때니 아마도 여름의 복판이었을 것이다. 먹는 둥 마는 둥 저녁상을 물리고 일기를 쓰다가 샤워를 마치고 나오면 밤 10시 근처였다. 얼마간의 고요를 지났을까. 그토록 환하던 조명과 TV가 꺼지고 이제 거실엔 나지막한 스탠드 불빛만이 아른대고 있었다. 
밤의 기운이 지평선처럼 펼쳐지던 시간. 그때까지 아빠가 "전축"이라 부르던 오디오에서 10시를 알리는 클래식 FM 방송의 시그널 송이 흘러나오면, 그 소리가 신호인양 한참을 부엌에 머무르던 엄마가 둥근 접시에 복숭아를 담아 내오셨다. 동시에 긴긴 여름 하루가 마무리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날, 각자의 구역으로 흩어졌던 네 식구를 다시 한 자리로 부른 것은 복숭아 접시였을까, FM 시그널 송이었을까, 노란 조명이었을까? 아마 그 전부일 것이다. 그 모든 보드랍고 포근한 것들이 맨발에 파자마 차림이 된 우리를 소곤소곤 불러모았을 것이다. 
지금 내 아이보다 어렸던 동생이 졸린 눈으로 엄마 옆에 붙어 머리카락을 꼬기 시작하는 시간. 모두들 저녁 식탁에서보다 한결 차분하고 나른한 모습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제야 눈이 번쩍 뜨였다. 잠옷에 과즙을 줄줄 흘리면서도 먹기 바빴다. 얇은 섬유 조직 사이로 축축한 것이 번져드는 게 느껴졌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접시가 비워질 즈음이면 이제 막 달콤해진 하루에 안녕을 고해야 한다는 사실이 덜컥 아쉬웠다. 충실하게 대하지 못했던 오전과 오후가 떠올라 ‘탐구생활’을 펼치고도 싶었지만, 이내 만족스런 졸음이 밀려왔다. 
그 복숭아 한 상자가 얼마나 비쌌을지, 무르디 무른 열매를 담은 상자를 옮기던 아빠의 손길은 얼마나 조심스러웠을지, 복숭아 상자를 차에 싣고 퇴근하는 아빠의 마음은 또 얼마나 뿌듯하고 설레었을지 헤아려 본 적은 없다. 다 큰 어른이 되어서도, 아이를 낳기 전까지는.

하여, 나에게 여름은 복숭아와 함께 온다. 아마도 그런 기억들이 아직 내 몸 구석구석에 남아있기 때문일 게다. 아이는 나를 닮았다. 수박보다 복숭아로 여름을 기억한다. 그러나 복숭아 중에서도 말랑하고 뽀얀 백도만 복숭아로 쳐준다. 
마트에서 사 온 백도를 살살 썰어 내면 접시가 놓이기 무섭게 아이 볼 속으로 들어간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 건 최근의 일이다. 하루에도 이 자리에서 몇 번이나 복숭아를 깎았던 것 같은데, 그게 내 입으로 들어간 기억은 별로 없다는 것도. 나 역시 둘째가라면 서러운 복숭아 귀신인데 말이다.
어릴 적에, 그 숱한 여름밤에, 아빠와 엄마가 복숭아를 드셨던가? 문득 스친 생각이었다. 그 맛나다던, 그 비싸다던, 저 멀리서 왔다던 귀한 복숭아를 한 조각씩만 드시거나, 전혀 드시지 않았던 것을 간신히 기억해냈다. “천천히 먹어라”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면 엄마는 어느새 잠들어버린 동생의 등을 쓰다듬으며 웃고 계셨다.  
어린 나는 아빠가 사오신 복숭아에 기대어 지루한 여름을 났구나, 최근에야 알게 된 새롭고 도 먼 사실이었다. 집안 어딘가에 있을 복숭아 몇 알 덕분에 내 하루는 반짝였다. 노란 불빛 아래로, 서로의 온기 곁으로, 약속이나 한 듯 식구들이 모여들던 밤 10시의 달콤함. 그게 아니었더라면, 느림보 여름은 나 보란 듯 더 천천히 걸음을 옮겼을 것이 분명했다.
올 여름엔 이런 이야기를 하며 부모님께 복숭아 한 상자를 사드렸더니 그렇게 좋아하실 수가 없었다.

장맛비 긋던 어느 오후, 냉장고에서 복숭아를 꺼내 썰어 내었다. 작게 자른 연한 조각들을 게눈 감추듯 삼키던 아이가 그런다. "엄마도 같이 먹어요" 이미 접시는 반도 넘게 비워진 후였다. 순간 그런 어른스러운 말은 아이가 좀 더 자란 뒤에 들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괜찮아. 너 많이 먹어." - 나도 이제야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아이 입가에 복숭아 물이 흐른다. 양 볼 미어지게 무언가를 씹는 꼴이 저도 우스운지 아이가 어깨를 들썩이며 쿡쿡 웃던 순간. 내 유년의 여름이 그렇듯 아이의 여름도 복숭앗빛으로 물들기를 간절히 바라게 되었다. 
나는 여전히 여름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는 복숭아를 독차지하지 않고도 하루를 씩씩하게 살아낸다. 방학 숙제, 납량 특선, 곤충 채집, 피서 따위 없이도 여름은 잘만 간다. 어쩌다 고운 복숭아를 보면 함께 먹고픈 사람, 양보하고픈 사람들을 떠올릴 줄도 알게 되었다. 참 감사하게도.
어느 해보다도 어둡고 눅진한 여름을 막 지나온 참이다. 그러나 시간이 멈춘 게 아닐까 의심스러운 날에도 계절은 오가고 구름은 흘러서, 며칠전 올려다본 하늘이 소재한 듯 말끔한 가을 하늘이었다. 요즘에야 사시사철 복숭아를 구할 수 있다지만, 나는 여전히 가을 복숭아나 겨울 복숭아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콧등이 울리도록 달기만 한 통조림 복숭아에도 여직 낯을 가린다. 따끈하게 잘 익은 복숭아를 한껏 베어 무는 꿈을 꾸며 수십의 가을날과 겨울밤을 보낸다. 올해는 또 얼마나 많은 복숭아를 그려보며 가을과 겨울을 나게 될까. 여름은 이제 가장 먼 계절이 되었다. 

 

 

 

■ 작가소개
- 스미레(이연진)
『내향 육아』 저자. 자연 육아, 책 육아하는 엄마이자 에세이스트.
아이의 육아법과 간결한 살림살이, 마음을 담아 밥을 짓고 글을 짓는 엄마 에세이로 SNS에서 많은 공감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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