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들의 책에는 ‘윤리’와 ‘지혜’가 있다
영화감독들의 책에는 ‘윤리’와 ‘지혜’가 있다
  • 송석주 기자
  • 승인 2020.09.08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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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신문 송석주 기자] 책 『문학의 시각성과 보이지 않는 비밀』의 저자 나병철은 “타자란 체제 내부의 일원인 동시에 실재의 잉여를 지닌 존재”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타자’란 우리 사회의 주변부에 위치한 ‘사회적 약자’를 일컫는 말이다. 인간의 영역에 속해있지만, 인간으로서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하는 존재이다. 그래서 타자는 영화나 문학을 비롯한 여러 예술에서 주인공으로 왕왕 등장한다. 예술은 고통, 특히 타자의 고통을 끊임없이 갈구하기 때문이다.

최근 서점가에는 ‘타자의 고통’을 담은 젊은 감독들(강상우, 윤단비, 이길보라)의 책이 잇따라 출간되고 있다. 그들이 만든 영화와 책 속 주인공들은 ‘타자’이다. 어딘가로 사라지고, 누군가로부터 상처받고, 중앙에서 주변으로 밀려난 존재들이다. 경계인이자 주변인으로서의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세 감독들은 타자의 고통을 막무가내로 전시하거나 착취하지 않는다. 타자의 내면을 스크린과 지면 위로 천천히 길어 올리면서 창작자와 수용자가 교감할 수 있는 공감과 치유의 장을 마련한다.

강상우 감독은 영화 <김군>(2019)을 통해 1980년 5월의 광주를 재조명한다. 특히 한 극우인사의 5·18 북한특수군 유입설의 구체적 근거로 쓰이게 된 한 남자, 통칭 ‘김군’으로 불린 존재를 실증적으로 쫓는다. 책 『김군을 찾아서』(후마니타스)는 영화의 스크립트 자료나 제작 노트를 그대로 수록한 ‘무성의한’ 작업물이 아니다. 책에는 영화에 포함되지 않은 미공개 자료, 당사자들을 직접 만나 확인한 새로운 이야기, 영화가 나온 이후 추가로 만난 또 다른 증언자들의 목소리와 최신 정보가 풍부한 도판과 함께 실려 있다.

특히 이 책은 영화 제작 기간과 영화가 나온 이후부터 책 출간 전까지 총 7년여에 걸쳐 이어진 103명의 시민군, 목격자, 연구자와의 인터뷰와 함께 이름 모를 광주 시민을 대상으로 한 횟수를 헤아릴 수 없는 탐문을 담고 있다. 촬영 순간의 정황까지 반영한 14킬로픽셀(14K) 사진을 통한 디지털 포렌식(각종 디지털 정보를 분석해 범죄 단서를 찾는 수사기법) 작업 방식은 책의 설득력을 더한다. 1983년생 저자가 80년 5월의 광주를 회고담이 아닌 현재 시제로 다가가기 위해 거쳤던 치열한 과정이 담긴 이 책은 ‘김군’이라는 익명의 타자를 경유해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과학적이면서도 윤리적으로 접근한다.

다음은 영화 <남매의 여름밤>(2020)을 연출한 윤단비 감독의 『남매의 여름밤 각본집』(플레인아카이브)이다. 영화는 재개발에 의해 삶의 터전을 잃은 한 가족의 모습을 통해 한국사회의 각종 편견과 모순을 묘파해낸다. 특히 할아버지의 집을 둘러싼 가족들의 갈등은 서민 계층의 주거 문제, 나아가 자본주의 경쟁에서 실패하고 탈락한 타자들의 이미지를 입체적으로 구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회문제 영화’로서의 장르적 특징을 보여준다.

이 책은 영화이미지를 오롯이 활자로 체험해볼 수 있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특히 이미지와 접목했을 때는 느끼기 어려웠던 저자의 건조하면서도 서늘한 대사가 인상적으로 다가오는데, 좋은 영화는 실재(實在, the real)에 가닿은 대사를 구사한다는 걸 깨닫게 해준다. 주변부로 밀려날 수밖에 없는 타자들의 현실적 대화를 통해 오늘날의 주거의 문제를 포함, 가족구성원 간의 관계성의 어려움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책이다.

마지막은 영화 <기억의 전쟁>(2020)을 연출한 이길보라 감독의 책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문학동네)이다. <기억의 전쟁>은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을 둘러싼 다양한 주체의 기억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유학생활을 보낸 저자의 고군분투가 담긴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는 그가 왜 타자의 고통을 다룬 <기억의 전쟁>이라는 영화를 찍을 수밖에 없었는지를 납득하게 한다.

여러 이유 중 하나는 저자가 농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청인 자녀, 즉 ‘코다’(CODA)로서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어릴 적부터 자연스레 사람과 세상의 ‘경계’를 보고 느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학교를 자퇴하고 아시아 지역으로 배낭여행을 떠난 저자는 학교 밖 공동체에서 배움을 이어간 기록을 <로드스쿨러>라는 다큐멘터리로, 농인 부모의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을 <반짝이는 박수 소리>라는 다큐와 책으로 담아내며 사회가 ‘정상’으로 규정한 것들에 끊임없이 의문을 가지고 균열을 가했다.

‘농인의 자녀’ ‘로드스쿨러’ ‘여성 영화감독’이라는 정체성을 지니며 자신은 물론 사회에 쌓인 겹겹의 편견을 마주하고 깨뜨려나가는 성장기인 이 책은 카피 그대로 “삶의 지도를 확장하는 배움의 기록”으로서의 미덕을 가지고 있다. 위 세권의 책은 모두 타자들의 고통을 자극적으로 묘사하지 않고도 그들의 내밀한 이야기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풍부하게 들려주는 방법을 아는, 윤리와 지혜의 미덕을 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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