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 명문장] 성 정체성에 대한 고민도 죄가 된다면 『옷을 입었으나 갈 곳이 없다』
[책 속 명문장] 성 정체성에 대한 고민도 죄가 된다면 『옷을 입었으나 갈 곳이 없다』
  • 전진호 기자
  • 승인 2020.09.02 09: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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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신문 전진호 기자]

어떤 관계

식탁에 둘러앉아 가족들과 먹는 저녁. 밥 지은 냄새가 나는 식탁에 함께 앉아 있을 때 목구멍으로 어떤 말이 울컥울컥 올라오기도 한다. 한 번도 뱉은 적은 없다.

몇 해 전 서울 광장에서 했던 퀴어 문화 축제에 다녀왔다. 성 소수자 부모 모임이라는 작은 부스가 있었다. 천 원을 주고 “성 소수자 자녀를 둔 부모 가이드북”을 샀다. 우리 부모님 나이쯤으로 보이시는 분들이 부스를 지키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연령대는 아니었다. 그들은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 자녀를 둔 부모들이었다. 내게 책자를 건네주시며 말씀하셨다. 식탁에 쓱- 올려놓고 외출하라고. 그 말에 같이 웃긴 했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란 걸 우리는 알고 있었다. 책자는 상자 깊숙이 숨어 있다가 일 년 후 버려졌다.

부모님께 커밍아웃하는 것은 그들 가슴에 못 박는 일이라고 들어왔다. 나는 잘 모르겠다. 부모가 나를 영원히 모르고 산다는 게 정말로 가족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누가 누굴 상처 주고 하는 것을 떠나서, 하기야 내가 사랑하는 것이 왜 남에게는 상처가 될까 하는 것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인데, 내가 하는 사랑은 왜 상처고, 잘못이고, 심지어 더러운 것이라고 말할까. 사랑에 지저분한 사랑도 있나. 그런 구분은 나에겐 어려운 것이다.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손바닥으로 그 부분만 가릴 수 있는 구멍 같은 게 아니었다. 그것은 내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선택과 미래의 계획까지 전부 이어져 있고, 그것을 감추려 할수록 수많은 거짓이 태어났다. 진심으로 말하건대, 나는 거짓이 거짓을 낳는 말들이 싫다. 하지만 평범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나는 거짓말을 해야 했다. 그 결과 조금은 평범한 딸이나 친구나 학생이 될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나를 좋아할 수가 없었다. 자꾸 거짓말을 하는 사람을.

언젠가 가족들에게 나를 드러낼 수 있을까. 커밍아웃했다간 집에서 쫓겨날 수 있으니 경제적 독립이 가능할 때까지 기다리란 조언을 수도 없이 들었다. 사람을 사귀고 어떤 집단에 속하고, 그렇게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갈 때마다 언제든 이들에게 버려질 수 있다는 생각을 그만할 수 있을까. 동성애는 죄악이라고 말하는 친구에게 아마 그 정도는 아닐 거라고 말할 수 있을까. 누군가를 사랑하기 시작할 때 한 사람을 정해두고 오늘부터 사랑해야지, 하지 않듯이, 나도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까.
못할 것이다. 어떤 말은 자꾸만 내 입속으로 숨어들었다. 그럴수록 커지는 나의 구멍으로 상처와 거짓이 고름처럼 쏟아진다. 그러면 글로 써볼까. 상당수는 글을 덮고 떠나겠지만 나는 그저 멀어졌다 여길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거짓말은 멈출 수 있지 않을까. 둘러앉은 식탁에서 목구멍으로 울컥 넘어오는 말을 삼키지 않아도 괜찮을 것이다. 그때에도 그들과 먹는 밥이 여전히 따뜻할까. <86~88쪽>

■ 옷을 입었으나 갈 곳이 없다
이제 지음│행복우물 펴냄│160쪽│15,3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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