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매의 여름밤’, “너 참 무서운 영화로구나!”
‘남매의 여름밤’, “너 참 무서운 영화로구나!”
  • 송석주 기자
  • 승인 2020.08.26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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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단비 감독, 영화 <남매의 여름밤> 스틸컷

[독서신문 송석주 기자] 영화의 제목에서 느껴지는 왠지 모를 정감과 오프닝 시퀀스만으로 <남매의 여름밤>을 표현하면, 이 영화는 어느 가족이 조그만 봉고차를 타고 할아버지의 집으로 놀러가는 영화이다. 근데, 뭔가 이상하다. 달리는 봉고차 주변의 황량한 골목길도 그렇고, 가족들이 주고받는 대화 역시 심상치 않다. 할아버지의 집으로 ‘놀러가는’ 느낌이라기보다는 가고 싶지 않은 곳으로 ‘밀려나는’ 것만 같다. ‘밀려나다’의 사전적 의미. ‘어떤 자리에서 몰리거나 쫓겨나다.’ 음, 다시 생각해봐도 뭔가 이상하다.

오프닝 시퀀스가 끝나면 관객들은 알 수 있다. <남매의 여름밤>은 남매가 방학을 맞아 시골의 할아버지 집으로 ‘놀러가는’ 영화가 아니라 재개발에 의해 주거 공간을 잃은 그들이 할아버지의 집으로 어쩔 수 없이 ‘밀려나는’ 영화라는 것을. 어느 가족이 모종의 힘에 의해 자꾸만 몰리고 쫓겨나는 영화. 그 ‘힘’이란 결국 빈민층의 삶의 터전을 위협하는 천민자본주의의 괴력. 혹은 국민의 삶을 수호할 여력이 없는 국가의 무능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남매의 여름밤>은 돈에 의해 모든 것이 좌우되는, 물질만능주의에 의한 비정(非情)의 이미지로 점철된 지독한 ‘사회문제 영화’(social problem film)이다.

윤단비 감독, 영화 <남매의 여름밤> 스틸컷

줄거리를 살펴보자. 옥주(최정운)와 동주(박승준) 남매는 아빠와 함께 할아버지의 낡은 이층 양옥집으로 이사를 간다. 정확히 말하면 재개발에 의해 갈 곳을 잃은 그들이 (대화의 정황상) 교류가 거의 없는 할아버지의 집에 얹혀살기 위해 이사를 간다. 설상가상으로 나중에는 고모부와 별거 중인 고모까지 합세한다. 말하자면 <남매의 여름밤>은 자식들이 집을 잃거나(아빠) 이혼 위기(고모)의 긴박한 상황에서야 제 아버지를 찾는 불효막심한(혹은 불쌍한) 남매에 관한 영화이며, 그런 남매를 응시하는 또 다른 남매(옥주와 동주)에 관한 이중 구조의 영화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제목을 <두 남매의 여름밤>이라고 해야 보다 정확할 것이다.

찬찬히 살펴보면 <남매의 여름밤>은 봉준호의 <기생충>(2019)과 닮은 구석이 많다. 아니, 그보다 더 모질고 잔인하다. 그 유명한 ‘문광의 초인종 소리’ 이후 경쾌한 하이스트 필름(Heist film : 무언가를 강탈하는 것을 주 내용으로 하는 영화)에서 유혈이 낭자하는 호러로 급격한 장르 전환을 이루는 <기생충>처럼, <남매의 여름밤>은 독립영화 특유의 일상적 풍경에 공포를 유발하는 호러의 이미지를 이따금씩 끼워 넣으며 한국사회의 각종 편견과 모순, 구조적 폭력을 드러낸다. 근데 잠깐만, 호러의 이미지라고?

윤단비 감독, 영화 <남매의 여름밤> 스틸컷

<남매의 여름밤>과 <기생충>은 모두 ‘이층 양옥집’이 주요 공간적 배경이다. 두 영화에서 이층 양옥집이 붕괴하는 이유는 저마다 제각각이지만, <남매의 여름밤>이 <기생충>보다 더욱 잔혹한 이유는 우리 사회의 마지막 울타리라고 할 수 있는, 가족이라는 최저 방어선이 균열을 보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기생충>의 ‘기택’(송강호) 가족들은 생존을 위해 ‘박사장’(이선균) 가족의 대척점에서 단일대오를 취한다. 그것은 지하에 살고 있는 ‘문광’(박정은) 가족들 역시 마찬가지다. 하층부의 인간들은 모두 가족의 이름으로 똘똘 뭉친다. 하지만 <남매의 여름밤>은 죽어가는 할아버지의 이층 양옥집을 ‘갈취’하기 위해 아빠와 고모가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부터 균열을 일으킨다. 연대도 퇴로도 없는 각개 전투의 무자비한 전장. 그것이 바로 <남매의 여름밤>을 뒤덮고 있는 주된 정서이자 이미지들이다.

비참한 것은 할아버지의 집 소유권에 대한 아빠와 고모의 대결 구도가 아빠와 옥주의 관계로까지 전이된다는 데 있다. 생계를 위해 가짜 나이키 신발을 진짜로 속여 파는 아빠. 그 가짜 신발을 진짜로 믿고 몰래 훔쳐서 중고 시장에 내다 팔다가 경찰서에 붙잡히는 딸. 말하자면 가짜(가난)의 대물림. 이어 할아버지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자 집부터 팔 생각을 하는 아빠를 향해 옥주가 말한다. “할아버지한텐 얘기했어? 할아버지 요양원 보내놓고 아빠 마음대로 집 파는 건 좀 심하잖아.” 이에 대한 아빠의 반격. “뭐가 심한데? 너는? 신발 가져다가 네 맘대로 안 팔았어? 똑같은 경우라고.” 실로 섬뜩한 풍경이다. 가혹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천민자본주의의 초상(肖像). 이 영화가 현대인의 심리적 공포와 불안을 담은 호러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이쯤에서 생각해보는 <남매의 여름밤>의 영어 제목, ‘이사를 가다’라는 의미의 <Moving on>. 옥주의 가족들은 죽어버린 할아버지의 집에서 이제 어디로 이사를 갈까. 아니, 어디로 밀려날까. 윤단비 감독은 무슨 ‘미련’(영화의 오프닝과 엔딩에 삽입된 김추자의 노래 제목)으로 한여름 밤에 이런 이미지들을 스크린에 아로새겼을까. 감독은 바로 이런 이미지들이 지금의 한국사회를 뒤덮고 있는 가장 적나라하고 무서운 공포의 현장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이 모든 상황을 카메라는 별 다른 움직임 없이 시종일관 방관자적 태도로 포착한다. 소파에 앉아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지고 있는 끔찍한 전쟁 상황을 실시간 뉴스로 ‘관람’하는 무수한 익명의 시선처럼. 마치 그들만의 일이라는 듯이. 카메라는 멀리서, 고정된 상태로, 무력하게 가족 내부의 균열을 응시한다. 지독한 사회문제 영화이자 빼어난 모던 호러. <남매의 여름밤>, 너 참 무서운 영화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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