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신문 송석주 기자] 하지만 나는 그때까지 메모와 기록이 다르다는 것만 설명했다. ‘메모하고 기록하기’를 연결해 설명할 생각을 못했다. 사실 인공의 모든 일이 메모하고 기록하는 일이다. 내 직업인 책 쓰기뿐만 아니라 음악, 영화, 건축, 과학 등 다른 부문의 전문가들도 암묵적으로 사용하는 공식이다. 너무 광범위해서 엄두가 안 났고, 콘크리트처럼 딱딱하게 굳은 ‘글쓰기의 상식’에 헤딩하기도 겁났다.<9~10쪽>
레오나르도는 분명 메모와 기록의 차이점을 알았다. ‘여기 메모한 것은 각종 논문에서 베껴 와 아직 정리가 되지 않은 초고 상태’라고 말하지 않았나. 위대한 레오나르도가 아쉬워한 건 그 많은 메모를 연결해 기록으로 매듭짓지 못한 것 아닐까.<18쪽>
철학자 미셸 드 몽테뉴는 보란 듯이 실천했다. 큰 책상 위에 책을 잔뜩 올려놓고 이 책 저 책 읽으면서 여기저기서 글을 인용했다. 그 글을 엮은 『수상록』에서 자신은 기억력이 좋지 않다며 이렇게 말했다. “꿀벌은 이 꽃 저 꽃을 빨아 꿀을 만든다. 그러나 그 꿀은 전적으로 꿀벌의 것이다. 나는 내 생각을 강조하기 위해서 남의 말을 빌린다. 남에게서 빌려온 구절을 변형하고 혼합해서 자기 작품, 자기 판단으로 만든다.<34쪽>
거의 모든 글쓰기 책이 ‘글쓰기는 어렵다’는 데서 출발한다. ‘어렵다, 어렵다’를 강조하고 시작한다. 수영을 배우러 온 사람에게 ‘물은 무섭다, 위험하다’는 인식부터 심어주는 셈이다. 그런 인식을 갖고, 두려워하며 깊은 물속에 들어가는 사람은 평생 물을 무서워하게 된다.<44~45쪽>
사소한 메모라도 어떤 식으로든 다른 메모와 연결된다.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사실들 같지만 분명 어딘가에 인과관계가 있다. 쓸모가 없거나 나쁜 메모는 없다. 당장은 쓸모없는 것 같은 메모라도 다른 메모와 연결되면서 쓰임새가 생긴다. 같은 메모라도 볼 때마다 다르다. 다른 메모를 보지 않고 그 메모를 봤다가 다른 메모를 보고 그 메모를 보면 전혀 다른 메모로 다가온다.<147쪽>
『글쓰기의 상식에 헤딩하기』
유귀훈 지음│블루페가수스 펴냄│200쪽│15,000원